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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해 Oct 15. 2021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기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그의 철학은 언제나 명쾌하지만 이번 책만큼 나의 사고체계를 뒤흔든 책은 없었다. 그간 생각해왔던,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들이 뒤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했다.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사랑(에로스)의 종말의 원인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있으며, 사랑이 다시 원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얼굴(이미지로서 전시되거나 소비되는 것이 아닌)'로 표상되는 타인에 전적으로 귀속되다시피 합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타인에 흡수되었다가 다시 타인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새 정체성을 가진 채 회귀한다. '너를 만나고 나도 몰랐던 날 알게 되었다'라는 말이 사랑을 묘사하는 정확한 말이 되겠다.


사랑의 종말에는 성과사회, 피로사회 등 그가 펼쳤던 논리가 자연스레 스며든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폭력은 에로스에도 영향을 미쳐 사랑을 한없이 가볍고 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에 대한 긍정은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돼'라는 문장들로 바꿔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병철 선생은 이에 반하여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누구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타인의 온전한 영역에 좌절을 느끼고, 그 온전한 영역을 사랑하는 것이 에로스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안락함으로부터 달아나는, 혹은 쫓겨나는 시도이기도 하겠다. 


이것이 자본을 쫓으며 '동일성'으로부터 안락함을 얻으려는 요즘 사람들에게 에로스가 싹트지 않는 이유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어지며 타인의 영향력은 조금씩 침식되고, 자아는 나르시시즘에 물들어간다.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시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에로스의 회복을 주창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경계시 되는 흐름이기도 하다. 수많은 클래식 멜로에서 풍겨 나오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어'라는 뉘앙스의 대사는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옳다. 자기애에 도취되어 주변을 둘러보지 않거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죄다 자신과 닮아 있는 '동일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안락함을 느낄지언정 사랑을 느낄 수는 없다. 사랑은 거대한 타자, 자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토포스적(무소적인, 장소가 없는) 타자'에게서 찾아오는 것이다. 그 관계는 비대칭적이고(갑과 을의 관계이고), 자기 파괴적이다. 관계 안에서 에로스를 제외한 다른 가치들은 힘을 잃고 무력해진다.


사회의 질서가 개인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요즘일수록, 에로스는 '묵시록적 환경'에서만 찾아올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타이타닉>, <아가씨> 등 일상을 파괴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나는 영화가 가히 로맨스의 끝판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주장과 무관하지 않다. 나 역시 일상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이래저래 노력을 하지 않는 바 아니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한계가 있다. 에로스를 강렬하게 원한 것은 아니나,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단조로움을 가장 쉽게 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에로스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에로스가 품고 있다는 '용기'를 통해 나는 일상을 벗어날 수 있겠다. 더 '생동감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선 공고한 자아를 부숴야 한다. 스스로 부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부서지도록 놔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그간 사회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상황들을 겪고, 개인적인 문제들에 감정을 소비하면서 자아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기본값처럼 설정되어 있던 사상이나 생각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사상과 노력이 사랑의 종말을 부추긴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말이다. 다른 이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공고한 성벽은 감탄을 불러일으킬지언정 사랑하게 되지 않는데. 사람은 사람의 빈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10대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웹드라마, 멜로 웹툰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포르노 등 사랑을 전시하고, 소비하고, 대리만족에 그치는 오늘날의 상황이 새삼 눈에 들어오며 안타까워진다. 자본주의 열차가 속도를 높일수록 사랑의 가치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창밖에 펼쳐진 초원을 날아다니는 몇 마리의 나비처럼. 그러나 나비의 날갯짓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러니 사람들은 열차 안에 사육장을 공들여 지은 뒤 나비를 키우고 관람하는 것이다.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 열차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떨어지고 굴러 다칠지언정 들판으로 날아가 자신만의 나비를 뒤쫓을 자유가 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눈으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유의 세계, 시각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갇히지 말아야 하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몸이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다칠까 봐 걱정하며 열차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 일은 바깥에 펼쳐진 살아 있는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하지 않겠다는 의지겠다. 자본주의의 열차에 올라타 멍하니 구경만 하겠다는 무기력한 태도겠다. 그리고 그건 기존에 품고 있던 나의 생각과도 많이 어긋난다. 이제 열차에서 뛰어내릴 마음은 먹었다. 문제는 언제 뛰어내릴 것인가 하는 일.


에로스가 타인에게 종속된 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책이 품고 있는 사유를 한껏 거닐다 새로운 나를 발견했으니, 나는 이 책을 잠깐이나마 사랑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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