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n Aug 26. 2020

시련은 한 번에 몰려온다

#44

혜아가 한국에 갔다 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꽤나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나눠왔다. 밴라이프 초반에는 언제나 부족한 돈 때문에 몇 달만 한국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 올 테니 그동안 나 혼자 밴라이프를 하고 있으면 어떻겠냐고 했었다. 그 당시엔 혜아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6개월 이내에 돌아올 거라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내가 아는 혜아는 아마 그때 한국에 갔다면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글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혜아가 한국에서 떠나올 때에는 이렇게 오래 여행을 할 계획은 없었기에 가족에게 여전히 밴라이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모님께서는 제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계셨기 때문에 언제 가는 한국에 들어가서 제대로 설명을 드리고 다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니스에서 스냅 촬영을 마쳤을 때 즈음 혜아는 한국에 갔다 오기로 결정했다.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셨던 어머님께서 빨리 오길 원하시기도 했고 겨울에 한국을 떠나왔던 혜아도 여름옷을 좀 챙길 겸 그리고 가족들과 제대로 의논도 할 겸 바로바로 며칠 뒤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그래서 우린 열심히 달려야 했다. 우리 차의 속도로는 니스에서 파리까지 적어도 삼일은 달려야만 하는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쉬지 않고 달린다면 하루 만에 갈 수 있었지만 사실 혜아가 한국에 가기 전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진짜 캠핑카를 직접 타보는 것이었다. 밴라이프가 목적도 아니었고 우리가 꿈꾸던 삶도 아니었기에 지금의 우리 고물 밴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이 많아지고 있었다. 또 유럽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만났던 캠핑카들이 점점 부러워지고 있었다. 저런 차에 타면 사랑이의 자리도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테이블도 있을 테니 삶이 더 윤택해지겠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다. 물론 캠핑카를 살 능력은 안되었지만 그래도 캠핑카의 내부는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니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캠핑카 전시장을 찾아내 가보기로 했다.
실제로 타본 캠핑카의 내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 우리 밴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삶을 살 수 있어 보였다. 천정에는 어마 무시한 크기의 창문이 뚫려있어서 캠핑카의 드넓은 거실과 부엌을 밝힐 수 있을 만큼의 빛이 쏟아져내리고 있었고 운전석과 조수석의 의자는 거의 소파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호텔 같은 아늑하고 넓은 샤워실은 똑바로 일어서서 씻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았고 화장실과 따로 분리가 되어 있어서 샤워를 하기 전에 화장실을 밖으로 빼낼 필요도 없었다. 침실은 드넓었으며 창문이 사방에 나있었고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밖에서 보이지 않을 거 같았다.
침실과 운전석 사이 거실에는 큼지막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고 운전석과 조수석을 거실 쪽으로 돌리면 6명은 앉아서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커 보였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있었고 모든 문과 창문을 완벽하게 막아주는 모기장도 있었으며 실내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중앙제어장치까지 있었다.
우린 이 캠핑카를 살 수 있는 돈이 생기면 주저 없이 구입해서 넓은 집을 타고 다니자며 어린아이들이 나눌 법한 대화를 하며 밴으로 돌아왔다.


혜아를 처음 만난 이래 우린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 이번 한국행은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될 터였다. 그래도 만난 지 일 년도 안되었지만 우리의 관계에서 가장 큰 일이니 그냥 한국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송별회를 하기로 했다. 우리끼리의 조촐한 송별회이지만 캠핑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캠프 파이어도 하고 술도 실컷 마시고 춤도 추면서 신나게 보낼 계획이었다.
 혜아와 나만 즐길 수는 없으니 사랑이도 목줄 없이 뛰어놀 수 있도록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을 것 같은 숲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얼마나 사람도 없는 자연 속인지 길은 시속 5km 이상으로는 절대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웅덩이들이 곳곳에 패여 있는 흙길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한참을 나뭇잎 한 점 없는 겨울나무들을 헤치고 들어가서야 우리가 정박할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아냈다. 
정박지까지 오면서 눈에 보이는 나무들을 모두 주워 차에 실어왔지만 사실 캠프파이어는 커녕 제대로 불을 피워본 적도 없었다. 인터넷으로 보고 읽은 지식이 전부였고, ‘그냥 나무 쌓아 놓고 라이터로 불 붙이면 되지 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우린 송별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각종 야채와 고기를 꼬치에 꽂아 불 옆에 세워놓고 케밥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역시나 정박지로 오늘 길에 마트에서 산 싱싱한 돼지고기가 토마토 그리고 양파 등 각종 재료들을 나무 꼬치에 예쁘게 썰어 꽂아 놓은 뒤 나뭇가지들을 쌓아 놓고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불이 잘 붙는 듯했으나 이상하게도 금세 꺼져버렸다. 그래서 조금 더 굵은 나무를 가져와 그 위에 놓고 불을 붙이니 조금 더 잘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대충 캠프파이어가 준비된 듯 하자 음악도 틀고 목줄 없이 신나게 숲 속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땅을 여기저기 파대고 있던 사랑이도 옆에 불러 앉혔다. 해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황금색으로 지고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캠프파이어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길어야 한 달 반 정도 떨어지는 것일 뿐인데 장난으로 시작한 송별회가 정말 진지하게 느껴졌다. 테이블도 없이 낙엽들 위에 주저앉아 음악을 들으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고 있자니 내일모레 혜아가 비행기를 타고 우릴 떠난다는 것이 사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못해준 것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아련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오붓한 시간을 모닥불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불은 잠깐 반짝 타오르다가 사그라들기 일쑤였고 불 주위에 꽂아둔 고기 꼬치는 밑둥이 열기 타서 자꾸 쓰러졌다. 꼬치들을 손으로 들고 어떻게든 모닥불에 익혀보고 싶었지만 약해진 불도 뜨거워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날도 어둡고 추워져서 결국 우리는 불을 끄고 차 안으로 들어와 가스렌지 불에 나머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남은 술을 마셨다. 역시나 우린 캠핑을 싫어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송별회의 밤이 얼렁뚱땅 끝나버려 기분이 썩 개운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자연 속 밴 안에서 셋이 오붓하고 조용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어설픈 송별회를 마친 다음 날 우린 파리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하루 종일 달리면 저녁 즈음엔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중간중간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게 되면 차를 세우고 구경을 하기도 하고 예쁜 마을 지날 때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걷기도 하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을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며 이동했다.
내일이면 밴라이프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혜아가 없는 밴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 배변 훈련도 안 끝난 사랑이의 독박 육견까지 맡아야 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다.


공항에 도착한 것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샤를 드골 공항의 어느 한산한 공원 주차장에서 정박하기로 했다. 잠시 한국으로 가는 것이니 챙길 짐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혜아의 커다란 캐리어가 하나 밴에서 없어진다고 하니 커다란 무언가 하나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충 짐을 챙기고 자는 듯 마는 듯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어느덧 차 밖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씩씩하게 갔다 올 거라고 다짐을 하던 혜아는 사랑이를 두고 차에 내리는 순간부터 펑펑 울기 시작했고 공항에 들어섰을 때 즈음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혜아가 탑승장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 난 바로 밴으로 돌아가 크로아티아를 향해 밴을 몰았다. 어차피 혜아도 없으니 경치 구경이니 여행이니 다 제쳐두고 운전만 하기로 했다. 밥도 저녁 외에는 거의 먹지 않았고 잠도 최대한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잤다. 일어나자마자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까지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달렸던 이유는 바로 쉥겐 국가에서 머물 수 있는 90일의 기간이 다 지났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에서 파리로 바로 갔어야 비자 기간에 맞춰 크로아티아로 갈 수 있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프랑스 니스에서 스냅 촬영을 했던 것이다. 쉥갠 조약 국가에 일주일 이상 초과 체류를 한 상태였고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국경 검문소의 경찰들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먼저 슬로베니아 쪽 국경 경찰은 유럽연합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을 9일이나 초과했으니 봐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름한 남자와 개 한 마리가 타고 있는 낡은 밴이 수상했는지 내부 곳곳을 샅샅이 뒤졌고 심지어 차 문의 벽면까지 두들겨 보았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쪽 국경 경찰은 밴의 앞바퀴들이 너무 심하게 닳아서 위험하기 때문에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어오더라도 자기들이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사실 앞바퀴가 너무 심하게 마모가 되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서유럽보다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크로아티아에서 교체할 심산이었지만 초과 체류한 사실 때문에 일일이 까발려지고 있었다.


슬로베니아 국경 경찰이 내 여권 정보를 확인하러 간 사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크로아티아 국경 경찰이 아빠 같은 측은한 미소를 지으며 날이 추우니 점퍼의 지퍼를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내 점퍼는 이가 가려운 사랑이가 물어뜯어 망가져 있었고 그 순간 물어 뜯겨 여기저기 빵꾸 난 점퍼와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뒷굽이 다 닳다 못해 평평해져 있는 낡은 워커를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여기서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때 내 여권을 들고 돌아온 경찰은 그 웃음이 싹 가실 말을 해주었다. 쉥겐 조약 국가 내에 초과 체류한 벌금 250유로를 슬로베니아로 돌아가 은행에서 납부하고 그 영수증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슬로베니아를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 타이어를 모두 교체를 해야만 크로아티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난 경찰들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차를 돌려 전날 정박했던 국경 근처 슬로베니아 어느 마을의 무료 정박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통장에는 10만 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는

www.youtube.com/cbvanlife

www.vanlifer.co.kr

인스타그램은 @lazy_dean

작가의 이전글 변한 것은 우리의 욕심뿐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