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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Sep 03. 2020

[단편] 그녀의 봄 나들이 - 1

결혼, 권태 그리고 다시 두근거림에 대하여...

 봄. 봄. 봄. 봄이 왔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향기 그대로...
 그대여, 나와 함께 해주오.
 이 봄이 가기 전에 다시 봄 봄 봄 봄이 왔네요.

 퇴근길 라디오에서 봄노래가 한창이다.

 진아는 조금 전 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아들 우석이 ‘엄마’하고 달려 붙는다. 녀석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근처에 사시는 시부모님은 그녀가 퇴근하기 바로 전에 돌아가신 듯하다.

 진아는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학교 과제물을 점검하고, 공부를 도와준다. 조금씩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돌봐 주어야 할 게 너무 많다.

 한참 동안 아들과 입씨름을 한 뒤 방에서 나온다.

 시계를 보니, 10시에 가깝다.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이다. 그는 대기업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한다.

 몇 달 전부터 미세먼지가 인체에 미치는 라이프 사이클 변화를 분석하느라 야근이 잦은 편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화려한 샐러리맨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우선 남편은 국내 대학 - 요즘 유행하는 무슨 주술서 같은 해괴한 리스트를 읊자면 - SKY는 물론 서성한ㅇㅇㅇㅇ 도 아닌 대학 경영학과 학사출신이다.

 해외 MBA나 박사 출신이 지천에 널려 있는 경제 연구소에서 무슨 재주로 버티고 있는지 가끔 본인도 신기할 정도라 한다.

 또한, 경기가 하강국면에 접어들고 찬바람이라도 휘익 불어 그룹 회장님 심기가 곤두서면, 가장 먼저 잘려 나가는 곳 역시 당장 돈이 안 되는 연구소 같은 곳이다.

 회사 직원들끼리도 스스로 파리 목숨이라고 자조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십이 넘어서 부터는 부쩍 실제 찬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회사 일보다는 개인 일에 더 비전 있는 사업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그녀 앞에서 늘어놓곤 하였다.  

 곧이어, 야근 후 가볍게 한 잔 하고 들어 온 남편.

 그는 술자리 분위기가 아쉬웠는지, 냉장고에서 레드와인과 치즈를 꺼내고는 아내를 부른다.

 오랜만에 식탁 위에 부부가 마주 앉았다. 앉고 보니, 그나마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 부부라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참, 당신 그 소식 들었어?“
 남편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본다.

 ”무슨 소식?“

 ”우리 회사에 있다 보험 쪽으로 파견된 백수현 과장 말이야.“
 백 과장은 남편 회사 모임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 진아도 알고 있는 여직원이다.

 남편은, 지금 회사에서 발생한 떠들썩한 불륜사건, 대기업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뭐랄까 TV 아침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건 내막은 이렇다.  

 속칭 ‘유부남 킬러’ 백 과장이 같은 지점 직원 홍 차장과 불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홍 차장 부인이 뒤를 밟아 확실한 증거를 잡은 후에, 그 둘이 근무하는 지점으로 쳐들어가 모든 직원과 고객이 보는 앞에서 남편 정부情婦의 머리채를 잡고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백 과장은 일치감치 사직서를 내고 잠적했고, 홍 차장은 연차를 내고 휴가 중이다.

 남편은 이야기를 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이리저리 검색을 하더니 블라인드(익명 게시판)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 올라온 글들을 진아에게 보여 준다.

 그녀가 화면을 내려 읽어보니 이 사건을 두고 블라인드에서는 그야말로 와글와글.

 유부남 킬러 백 과장에게 홍 차장이 희생되었다는 주장,

 남녀 사이 일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것이라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

 백 과장을 일방적으로 마녀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글들이 줄을 이어 올라왔다.

 그에 달린 댓글은 아무리 익명 게시판이지만 차마 읽기조차 민망했다.

 남편은 요즘 둘 이상만 모이면 이 핫한 이야깃거리에 회사 분위기가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그중, 젊은 여직원들은 남녀가 불륜을 함께 저질렀는데 왜 여직원만 퇴사를 하냐는 다소 페미니즘 관점으로 접근하는 반면,

 부장급 아재들은 백 과장과 같이 몸매도 되고 얼굴도 받쳐주는 여직원과 스윗한 로맨스를 꿈꾸며 은근히 홍 차장에 대해 운도 좋은 친구라고 부러워하는 기색도 있다고 한다.  

 “좀 지저분하지 않아. 젊은 애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혼의 로맨스는 더욱 아니고.”

 진아는 입을 가운데로 모아 다소 삐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도 백 과장을 몇 번 보았잖아, 같은 여자 눈에는 어떻게 보여?”

 “글쎄, 내가 서너 번 정도 보았나?
 여자 눈에는 별로... 근데 남자들에게는 섹스어필이 좀 된다며?
 싱글이면서 유부남을 좋아하는 독특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고, 여자들끼리 화장실에서 수군거리던데...”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히 대꾸하면서 와인을 한 잔 홀짝이며 남편을 바라본다.

 순간, 남편의 의뭉스러워 보이는 태도가 어째 좀 이상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양쪽 끝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다.

 이어서 와인 잔 속에 코를 들이대며 새삼 맛을 음미해 보더니 한 모금 마신다.

 그렇게 같은 동작을 두세 번 반복한다. 그런 후,

 “난 백수현 스타일 좋더라. 섹시하잖아. 어딘가 몽환적이고.”

  “........?”

 “나 사실, 작년 여름인가? 백 과장에게 훅 갈 뻔했어.

 그날 저녁 모임이 있었는데, 백 과장이 참석해 우연히 내 옆에서 술을 마시더라고.

 그 친구가 그날따라 너무 많이 마셨는지 힘들어했어.

 나하고 같은 방향이라 집에까지 바래다주는데 택시 안에서 피곤한 지 고개를 내 어깨 쪽으로 기대어 자더라고.

 흠... 좋긴 좋더라. 그래 뭐랄까...

 찌릇찌릇한 느낌! 보호해 주고 싶은 느낌!

 야, 정말 섹시한 여자란 이런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느낌이 확 오더라고.

 집으로 들여보낼 땐 얼마나 아쉬웠는지... 이번에 퇴사만 하지 않았으면, 나도 한 번 어게인 해 볼 생각도 있었는데...”

 남편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싱글인 백 과장과의 짧았던 신체 접촉이 무척이나 아쉬웠던 듯 아내인 자기 앞에서 무심히 털어놓고 있다.  

 진아는 남편을 쳐다본다.

 신혼 때 같았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한바탕 했을 법도 한데,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그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점점 빠져만 가는 남편 머리숱과 눈가에 자글자글해지기 시작하는 잔주름들뿐이다.

 ‘아휴! 이제 저 인간이 점점 자기 아버지를 닮아가네!’ 하는 한숨과,  

 ‘인간아,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그 여자는 눈도 없을까 봐? 축 처진 뱃살이나 줄이던지, 혼자 김칫국만 마시면 뭐해!’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이후에도 남편은 섹시한 여자에 대해 계속 주절대며 와인을 마신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슬슬 싫증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혼자 있고 싶다.

 하루 종일 전쟁터 같았던 회사에서 벗어나 늦은 밤에는 조금이라도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싶다.

 얼마 전에 가입해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워킹맘 속풀이 대화방에서 수다를 떨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끙, 저 서방님께서는 도대체 언제나 끝이 나려나! 차라리 빨리 들어가셔서 백 과장인지, 천 과장인지 하는 그 분과 현실에서 못 이룬 사랑을 꿈속에서나 푸시던지...’

 하며 짜증 난 기색을 보일 즈음, 남편도 역시 그녀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었는지 진아를 투명 인간 취급하면서 잠을 자야겠다며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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