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마지막 날
위녕, 비가 내린다. 가야 할 것은 분명 가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와야 할 것들도 분명히 온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가야 할 것은 결국 가고 말 것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기까지, 그 모든 것이 혹시 다 내 손에 달려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언가가 달라질까 하고, 가야 할 것이 가는 시간을 결국 늦추어놓고 말았던 그 시간까지, 엄마는 참으로 많은 것을 지불했단다.
-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어떤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것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헤어지면 미친 듯이 아플 줄 알았던 사랑이 막상 이별 후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고 , 깊은 감정을 나누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이별이 생각지도 못하게 힘들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나는 지금의 가치를 선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그저 꿈처럼 찾아온 직업이니, 다시 한여름 밤의 꿈처럼 미련 없이 보내주어야지.
하늘에서의 시간을 동경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땅에서 더 많이 위로받은 시간들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질 것은 사람일 테다.
싱가포르의 번쩍번쩍한 마천루도 아니고, 칠리크랩도, 비행하며 스쳐갔던 나라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나와 함께 웃고 울던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지겠지.
내 나이 서른 살에 승무원이 되고 동기들 중 내가 제일 맏언니였다. 언니로서 모범이 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생각보다 교육에도 잘 못 따라갔다.
시험 성적도 좋지 않아 의기소침해진 어느 날, 동생들은 어설픈 위로를 건네기보다 점심을 안 먹은 언니가 걱정된다며 조용히 먹을거리를 건네곤 했다.
한 번은 안전 교육 시험을 치는데, 문제를 다 푼 사람부터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가면 되었다. 해석도 어렵고 끙끙 거리며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데, 벌써 문제를 푼 동기들이 한두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아.. 내가 마지막으로 남으면 어쩌지'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콩닥콩닥. 그러고 한참을 있다가 예상대로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일어나는데 뒤에서 동기가 내가 다 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인은 일찌감치 다 풀었음에도 방금 다 풀었다며 거짓말을 하는 그녀에게 그때는 언니라는 알량한 자존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는 걸 동생들 앞에서 꾹 참았다.
" 단조롭던 싱가포르 일상에 서로에게 비타민이 되어준 동기들. 타지에서 나에게 유일한 가족으로, 또 친구로, 회사 동료로 수많은 추억과 시간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얘들아. 감사하게도 신이 우리에게 떠날 겨를을 주었으니 슬슬 채비를 하자"
비록 세상살이가 춥고 두렵더라도 끝끝내 창을 닫지 않는다면, 다시 열 수만 있다면, 싱그러운 햇살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정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겠다. 햇살과 바람이 가져다줄 기쁜 소식을 맞이하며.
우지현 - 혼자 있기 좋은 방 중에서
2018.10.1 - 20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