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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레나 Sep 19. 2020

꿈처럼 찾아온 직업이니, 한여름 밤의 꿈처럼 보내줘야지

승무원, 마지막 날

위녕, 비가 내린다. 가야 할 것은 분명 가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와야 할 것들도 분명히 온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자.

가야 할 것은 결국 가고 말 것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기까지, 그 모든 것이 혹시 다 내 손에 달려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언가가 달라질까 하고, 가야 할 것이 가는 시간을 결국 늦추어놓고 말았던 그 시간까지, 엄마는 참으로 많은 것을 지불했단다.
-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어떤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것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헤어지면 미친 듯이 아플 줄 알았던 사랑이 막상 이별 후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고 , 깊은 감정을 나누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이별이 생각지도 못하게 힘들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나는 지금의 가치를 선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그저 꿈처럼 찾아온 직업이니, 다시 한여름 밤의 꿈처럼 미련 없이 보내주어야지.




 하늘에서의 시간을 동경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땅에서 더 많이 위로받은 시간들이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질 것은 사람일 테다.
싱가포르의 번쩍번쩍한 마천루도 아니고,  칠리크랩도, 비행하며 스쳐갔던 나라도 아니고 언제나처럼 나와 함께 웃고 울던 사람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지겠지.



 내 나이 서른 살에 승무원이 되고 동기들 중 내가 제일 맏언니였다. 언니로서 모범이 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생각보다 교육에도 잘 못 따라갔다.
시험 성적도 좋지 않아 의기소침해진 어느 날, 동생들은 어설픈 위로를 건네기보다 점심을 안 먹은 언니가 걱정된다며 조용히 먹을거리를 건네곤 했다.

 한 번은 안전 교육 시험을 치는데, 문제를 다 푼 사람부터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가면 되었다. 해석도 어렵고 끙끙 거리며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데, 벌써 문제를 푼 동기들이 한두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아.. 내가 마지막으로 남으면 어쩌지'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콩닥콩닥. 그러고 한참을 있다가 예상대로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 일어나는데 뒤에서 동기가 내가 다 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인은 일찌감치 다 풀었음에도 방금 다 풀었다며 거짓말을 하는 그녀에게 그때는 언니라는 알량한 자존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는 걸 동생들 앞에서 꾹 참았다.


" 단조롭던 싱가포르 일상에 서로에게 비타민이 되어준 동기들. 타지에서 나에게 유일한 가족으로, 또 친구로, 회사 동료로 수많은 추억과 시간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얘들아. 감사하게도 신이 우리에게 떠날 겨를을 주었으니 슬슬 채비를 하자"


비록 세상살이가 춥고 두렵더라도  끝끝내 창을 닫지 않는다면, 다시  수만 있다면, 싱그러운 햇살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정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겠다. 햇살과 바람이 가져다줄 기쁜 소식을 맞이하며.
우지현 - 혼자 있기 좋은  중에서

2018.10.1 - 20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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