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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Oct 25. 2019

선악의 저편,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고

※영화 제목: 『시계태엽 오렌지』(원제: 『A Clockwork Orange』, 1971)

※감독: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주연: 말콤 맥도웰(Malcolm McDowell)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묘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실 때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줄거리 요약: 알렉스는 패싸움, 폭행, 강간 등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비행 청소년이다. 그는 자기 패거리의 계략에 넘어가 고양이와 함께 살던 부인을 살인한 뒤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감옥살이를 한지 2년째에 정부의 새로운 교화 프로그램인 루도비코 요법에 실험자로 참가하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을 통해 알렉스는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성향이 마음속에서 발현되면 구역질이 나는 착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출소하게 된다. 하지만 그 뒤, 그는 이전에 자신이 폭력을 가했던 사람들과 경찰이 된 자신의 패거리 일당에게 복수를 당하게 되고 우연히 자신이 감옥살이 전 강간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남자의 집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려 찾아가게 된다. 반정부 인사이자 작가였던 그는 처음에는 알렉스를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려 하지만 알렉스가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고 자신을 반불구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알렉스에게 고문을 가하게 되고, 알렉스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병원에 이송된다. 병원에 입원한 알렉스를 찾아온 내무부 장관은 알렉스가 받은 루도비코 요법으로 정부가 비판을 받고 있다며 알렉스가 정부의 편을 들어주는 대가로 알렉스에게 돈과 일자리, 최고급 음향 기기를 선물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시계태엽 오렌지』는 사드의 『소돔의 120일』과 같은 맥락에서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악명이 높은 영화로,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은 영화이다. 하지만 『시계태엽 오렌지』는 큐브릭의 다른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샤이닝』,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같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카메라 구도, 음악의 사용 등 연출의 측면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을만한 영화이다. 더불어 상기한 큐브릭의 영화 중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

 이 글에서는 『시계태엽 오렌지』가 던지고 있는 메시지,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사용되는 큐브릭의 기법 등 『시계태엽 오렌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시계태엽 오렌지』은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기도 한데, 이 소설이 쓰인 1960년대는 자크 데리다를 필두로 한 해체주의가 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해체주의란 그 분야가 철학이든, 예술이든, 언어학이든 간에 기존의 전통적 사상 및 관점을 해체하고 이에 반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주의의 원형은 1800년대 후반의 니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등의 책을 통해 기존의 도덕률, 전통에 대해 그러한 도덕률이나 전통이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신'으로 대표되는, 차마 건드릴 수조차 없었던 도덕률이나 전통들이 모두 부서지게 되었다. 그 뒤 인간은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기준점, 지침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선악이라는 개념이 무너져내렸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으며 그로 인해 인간 사회에는 혼란, 무질서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니체와 해체주의의 사상은 영화의 두 번째 씬인 알렉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구걸하던 노인의 말을 통해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알렉스와 패거리들이 노숙자를 폭행하는 장면
어차피 난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도 않으니 죽여라, 죽여. 법도 질서도 없는 더러운 세상이야! 세상은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세상이 이래? 우주인이 달에까지 가고 사람들이 불꽃 주위를 맴도는 벌레같이 자주 주위를 맴돈단 말이지. 그치만, 땅 위의 질서나 법도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을 쓰진 않아.

 

 노인의 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세상은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주인이 달에까지 갔다는 부분이다. 먼저 세상은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아."라는 이 간단한 한 마디를 한 편의 영화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세 주인공, 늙은 보안관 벨, 돈에 대한 탐욕을 가진 르웰린 모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살인마 안톤 쉬거가 나오는데, 안톤 쉬거는 자신이 누군가를 살인할 때에는 반드시 동전을 던져 앞, 뒷면에 따라 살인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와 같은 안톤 쉬거의 동전의 앞, 뒷면이라는 확률에 근거한 '규칙'은 안톤 쉬거와 달리 돈에 대한 탐욕을 가진, 비교적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르웰린 모스와 대비되어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불확실성 및 혼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명확한 살인 동기가 없이 오로지 확률에 근거한다는 측면에서도 선악의 구분이 없는, 그리고 그때의 행동양식을 칭하는 니체의 허무주의에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르웰린 모스가 안톤 쉬거에게 죽은 뒤 벨은 자신이 더 이상 안톤 쉬거와 같은, 불확실하고 허무주의가 팽배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갈 힘이 없다고 체념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는 것이고 저 대사가 벨과 저 폭행을 당하는 노인이 맞닿는 지점인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주인이 달에까지 갔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노인이 한 말처럼 인류가 지상(의 질서)에 묶여있다가 로켓으로 천상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 그리고 인류의 사상 전반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임에 분명했고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에서 로켓이 현재의 인류를 있게 한 조건(도덕률, 전통)으로 대표되는 '어머니'에 대한 거부라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하늘 아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에 대한 치명적인 거부

                              

 위의 노인을 폭행하는 씬에서 이어지는 영화의 세 번째 씬에서는 먼저 여자를 윤간하고 있는 빌리보이 패거리가 비춰진 뒤 이내 알렉스 패거리가 나타나 빌리보이 패거리를 완전히 짓뭉개는 장면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 씬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는데 바로 빌리보이 패거리 일당이 모두 나치군의 복장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두 사진을 비교해보라.

빌리보이의 복장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그러므로 알렉스 패거리가 빌리보이 패거리를 완전히 박살 내는 씬은 바로 니체의 허무주의 이후 발발한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 초반부의 두 번째, 세 번째 씬은 상기한 1900년대 초반의 니체의 허무주의, 그리고 독일이 패망한 2차세계대전 이후를 그려내고 있다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시계태엽 오렌지』의, 더 자세히는 알렉스 사상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렉스가 살아가고 있는 극 중의 '현재'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두 사건 이후의 현대를 그려내는 스탠리 큐브릭의 미적 감각이 되겠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의 등장인물들의 머리색, 복장, 가구들은 모두 현대의 대중문화에 비추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래적이라고 할 수 있고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은 자신이 『시계태엽 오렌지』에 담아낸 메시지가 미래에도 유효할 수 있도록, 이러한 디자인을 차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스탠리 큐브릭의 미래적인 미적 감각 및 메시지는 현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하는 바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미래적 미적 감각

3. 공간 구도

 미술이나 디자인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가 하나 있다. '1점 투시'가 바로 그것인데, 1점 투시란 소실점이 하나라는 뜻으로 이를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다음의 그림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1점 투시

 위의 최후의 만찬을 보면 그림의 꼭짓점에서의 시선이 모두 예수의 머리로, 하나의 소실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1점 투시의 기법은 우리의 시각으로 하여금 소실점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켜 묘한 긴장감을 야기하기도 하고 또한 무엇보다 1점 투시 기법이 사용되면서 소실점을 기준으로 좌우가 대칭일 경우에는 정돈된 느낌을 들게 하기도 한다. 큐브릭은 1점 투시를 가장 잘 사용한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샤이닝』에서는 1점 투시를 활용하여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기계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미래상과 후에 설명할 등장인물들 간의 위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다음은 『시계태엽 오렌지』와 『샤이닝』에 사용된 1점 투시 구도의 사진들이다

1점 투시, 그리고 사물을 통해 표현한 기계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미래
『샤이닝』에 나타난 1점 투시

 1점 투시가 미래상을 표현한 것 외에도 등장인물들의 위계를 표현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샤이닝』의 한 장면을 보면 복도의 바닥을 끝까지 이어나가면 쌍둥이 소녀 뒤의 창문에서 소실점이 형성될 것이고, 복도의 바닥은 그 자체로 삼각형을 이루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각형은 어떠한 계층, 위계구조에 대해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도형으로 큐브릭은 이를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적절히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직 체포되지 않은 무서울 것이 없던 알렉스와 그의 패거리를 비추는 첫 장면이나 알렉스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내무부 장관이 점검을 온 장면에서는 알렉스와 내무부 장관이 모두 소실점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즉 삼각형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그 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고 있지만, 반대로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으로 치료를 받을 때나 작가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밥을 먹을 때는 알렉스가 삼각형의 최하층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성으로 인해 심슨가족의 패러디 장면으로 대체한 『시계태엽 오렌지』의  첫 장면
삼각형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내무부 장관
삼각형의 바닥에 위치한 수감된 알렉스
루도비코 요법으로 치료를 받는 알렉스
알렉스: "I feel very low in myself."

4. 음악의 사용

 큐브릭이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바로 '부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그리고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 9번 교향곡으로, 이 곡은 인류 역사상 불후의 명작이라고 칭송받고 독일에서는 국가와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곡은 인류애, 환희, 천상의 빛을 주제로 하고 4악장의 가사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거룩하고도 숭고한 노래라고 할 수 있는데 폭력적인 알렉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바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이라는 것이 음악과 관련된 대표적인 부조리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알렉스의 폭력적인 상상이 난무하는 와중에 흘러나오는 2악장, 그리고 히틀러가 나오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4악장을 통해 드러난다.

bgm: Beethoven Symphony no.9 Movement IV

 또한 영화에서는 알렉스가 루도비코 요법으로 교화가 되기 전까지는 시종일관 부조리한 형태로 음악이 사용되고 있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에서는 매우 경쾌한 음악이 나오고, 폭력으로 얼룩진 밤을 보내고 귀가하는 알렉스를 비추는 장면에서는 쓸쓸한 음악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밤에 혼자 귀가하는 알렉스를 보노라면 그의 모습에서 노고가 느껴지기도 하며, 이보다 가장 부조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알렉스가 작가의 집(집 이름이 'HOME'이다)에 침입하여 작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아내를 강간할 때 부르는, 뮤지컬 영화 중에서도 고전으로 평가받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OST 'singing in the rain'을 부를 때의 장면이다. 아마 이 장면이 영화 전체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장면일 것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주역이 바로 큐브릭의 'singing in the rain'의 사용일 것이다.

singing in the 'HOME'
singing in the rain

 하지만 큐브릭의 이러한 부조리한 음악 사용은 알렉스가 체포되는 장면까지만 이어지고 이후에는 알렉스가 경찰이 된 예전 자신의 부하에게 물고문을 당할 때나 집에서 쫓겨날 때는 매우 침울한 음악이 사용된다. 바로 이 지점이 스탠리 큐브릭이 관객으로 하여금 루도비코 요법을 받고, '치료'된 알렉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영화 초반부에는 폭력적인 장면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불쾌함, 불편함을 느끼지만 알렉스가 체포되고, 그가 자신이 괴롭힌 이들로부터 고통을 받는 장면에서 침울한 음악이 나오는 것을 들으며 그런 알렉스에게 점차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스탠리 큐브릭이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능력도 감독으로서 지닌 훌륭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선악의 저편

 앞서 상기한 것처럼 알렉스의 시대적, 사상적 배경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알렉스에게 있어 사회가, 종교가 제시하는 선악의 잣대는 의미가 없을 것이며 또한 그 자신조차도 그러한 잣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성적 쾌락과 폭력적인 것을 추구하고 숭배하기 때문에 그러한 악행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알렉스의 사상을 잘 표현하는 것이 알렉스가 작가와 그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에 온 뒤 9번 교향곡의 2악장이 나오며 비춰지는 장면들인데, 이 장면에서는 벽화와 뱀, 그리고 못 박힌 예수의 우스꽝스러운 동상 등을 보여주며 알렉스가 가진 성적 쾌락과 폭력에의 추구를 나타내고 있다.

알렉스의 못 박힌 예수에 대한 불경
알렉스의 폭력에 대한 동경

 알렉스가 만약 자신이 죄악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죄악을 저질렀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권선징악 형태의, 그리고 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고발하는 그저 그런 진부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에게 있어서 악행은 목적 그 자체였고 이는 그의 서랍에 쌓인 돈과 고급시계들, 그리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미 돈은 충분히 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알렉스에게 있어서 현대사회의, 감옥에 '격리'를 시키는 처벌은 알렉스를 교화시키지 못했으니,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성경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목사에게 이쁨 받지만 실상은 성경을 보며 신성모독을 하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좋아했던 것이다.

예수를 채찍질하는 상상을 하는 알렉스

 하지만 알렉스를 교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루도비코 요법이었다. 이 루도비코 요법은 범죄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고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영상을 틀어주면서 범죄자가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충동이 들면 구역질이 나도록 하는 요법이었는데, 이 루도비코 요법 도중 배경음처럼 나오는 9번 교향곡으로 인해 알렉스는 9번 교향곡을 들으면 마찬가지로 구역질을 하게 된다. 이 요법의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을 '선하게'는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조건반사의 형태로 선함이 발현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루도비코 요법의 맹점에 대해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이 기술이 정말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냐는 거야.
선함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거든.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사람이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지.                            


 루도비코 요법은, 알렉스가 선악의 저편에 있는 것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선이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똑같이 선악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계태엽 오렌지』의 원작 소설에서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악을 행하는 인간과 어쩔 수 없이 선을 행하는 인간 둘 중 누구를 더 아낄 것인가?"하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시계태엽 오렌지'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 오렌지는 상큼하고 싱싱한, 생동감이 넘치는 물체이지만 이것이 만약 '시계태엽'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과연 그것이 싱싱하고 생동감이 넘친다고 할 수 있을까?

시계태엽 '오렌지'가 된 알렉스

 알렉스를 통해서 드러나는 폭력과 성적 쾌락에의 무한한 추구를 보면서 관객은 알렉스 개인이 선악의 저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루도비코 요법을 통해 '선하게' 바뀐 알렉스를 통해 관객은 알렉스를 둘러싼 사회 또한 선악의 저편에 놓여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루도비코 요법으로 새사람이 된 알렉스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지만, 부모님은 이미 자신들이 아들처럼 대하는 하숙생을 받아 알렉스의 방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한 상태였고 알렉스는 절망에 휩싸인 채 집에서 나오고 만다. 그런 알렉스는 자신이 폭력을 휘둘렀던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노인은 알렉스를 알아본 뒤 주변의 노인들과 함께 그를 구타한다. 그렇게 구타를 당하던 알렉스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알렉스가 폭력으로 군림하여 알렉스를 따랐던, 그리고 알렉스를 배신한 그의 부하들이었으며 그들은 정부의 정책에 의해 경찰이 되어 있었다. 사회의 입장에서 선에 가까운 경찰들이 이미 선한 사람이 된 알렉스를 물고문하는 장면은 꽤 긴 시간 이어지는데, 관객들은 알렉스를 연민하게 되고 과연 사회가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하며, 무엇보다 폭력적이었던 알렉스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았지만 선한 사람이 된 알렉스는 비참할 정도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이 관객들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점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한다.

물고문 당하는 알렉스

 이와 같이 영화가 얘기하고 있는 '선악의 저편'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 절정에 치닫고 있다. 반정부 인사였던 작가와 그의 동료 정치인들은 고통받는 알렉스를 통해 정부가 추진한 루도비코 요법의 비인간성을 빌미로 하여 정부를 공격하려 하지만, 알렉스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작가는 알렉스에게 그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9번 교향곡을 듣게 하는 고문을 가하게 된다. 이 고문을 견디지 못한 알렉스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가게 되는데, 이 병원에서의 수술을 통해 알렉스는 루도비코 요법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알렉스는 그가 예전의 폭력적인 자아를 찾았는지 검사를 받게 되는데, 폭력적인 언사를 할수록 의사에게 칭찬을 받는 알렉스의 모습, 그리고 원래대로 돌아온 알렉스를 극진히 대접해주는 내무부 장관의 모습은 사회가 정말로 선악의 저편에 놓여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내무부 장관과 손을 맞잡고 카메라 세례를 받는 도중에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눈밭에서 여자와 성교를 하고 있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치료되었다."라고 말하는 알렉스의 독백이 '선악의 저편'이라는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내무부 장관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먹는 알렉스

6. 결론

 『시계태엽 오렌지』는 여태까지 서술한 대로 선과 악의 대립을 넘어선 주제의식, 그리고 이를 표현하고 있는 음악사용, 카메라 구도 등의 연출기법이 돋보이는, 스탠리 큐브릭의 가장 뛰어난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전하고 있는 주제의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 그리고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선악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알렉스가 수감된 교도소의 소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처벌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푸코가 현대사회의 처벌에 대해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도소장이 말하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가장 원시적인 형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 형법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서 더 발전된 처벌은 광장에서의 화형, 단두대 등 잔인한 형벌을 통해 이를 본보기로 삼아 사람들이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세 시대의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발전한 근대의 처벌은 바로 알렉스처럼 사회에서 격리하여 죄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소극적 형태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여태까지 설명한 처벌들과는 달리 사회가 원하는 규약, 지침, 기준 등을 인터넷, 학교,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내면화하고 저 유명한 판옵티콘처럼, 부지불식간에 개인이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여러 수단을 사용하여 감시하고 있다. 이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의 루도비코 요법처럼 인간을 전연 악한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측면에서 『시계태엽 오렌지』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는 영화인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대에도 『시계태엽 오렌지』에서처럼 부조리한 음악사용 등의 연출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관객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는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만드는 영화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조커』이다. 『조커』에서는 주인공이 완전히 악인으로 변한 시점부터 경쾌한 음악이 사용되고 있고 주인공인 조커는 시종일관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을 듯이 웃고 있는데 이는 부조리하다는 측면에서 『시계태엽 오렌지』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두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알렉스와 조커로 대표되는 '악'을 이해하도록, '선'이 '선'인지, '악'이 '악'인지, 혹은 선과 악을 도대체가 구분할 수가 있는 건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를 대표해주는 현상이 바로 두 영화 모두 논란이 되었던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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