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나이가 들어서 아빠를 불쌍하게 여길수있게되었다. 영화 속 인물과는 결이 많이 다르지만. 그리고 그토록 혐오하는 사람인 아빠와 내가 참 많이 닮았었다는 것, 그래서 아빠가 안쓰럽기도했다.
영화 애프터썬은 11살때 아빠와 터키로 여행갔던 꿈을 꾸던 소피가 깨어난다. 그리고 소피의 아내가 잠에서 깬 소피에게 31번째 생일을 축하해준다.
영화의 내용은 소피의 꿈 그리고 소피의 기억의 파편, 거짓말 할 수없는 캠코더 속, 그리고 소피가 그려내는 새로운 이야기.
"지금 130살인 캘런은 이틀 후에 131살이 되는데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왜 소피는 아빠에게 130살이라고 했을까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곱씹고 곱씹은 후에 소피의 행동이 이해갔다. 극중 소피는 11살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빨리 나이 들줄 몰랐다.
소피에게 30살 31살의 나이는 절대 오지않을 아득히 먼 미래라고 느꼈기에 100이라는 거대한 숫자로 아빠의 나이를 부른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 31살 생일을 맞이한 소피는 그때 아빠가 얼마나 어렸는지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에 올 나이였다는걸 생각한다.
하루 종일 소피에게 맞춰주다가도 종종 홀로 현타가 오는 것같은 캘런. 그렇게 어린딸을 두고 홀로 방 문도 잠궈버린채 잠들고... 그 다음날엔 소피에게 거듭 사과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대도 불구하고 널 위해 맞춰주고있잖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해. 그러다 불현듯 들이 닥치는 우울에 온 몸에 젖은 솜처럼 무너지고. 다시 아침이 오면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고 거대한 미안함이 남는다.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이미 모든 죽음을 스스로에게 약속한 캘런에게 들려오는 31살의 생일축하노래...
거대한 비극이 아니라서 더 슬펐다.
극중 캘런이 옷을 벌거 벗은 채로 문을 잠그고 아이처럼 훌쩍일때 난 캘런이 몹쓸 병에 걸린 시한부 환자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보여지는 동성애 코드들을 보며 나는 캘런이 동성애자로 살면서 괴로웠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캘런은 몹쓸병에 걸리지도않았고 동성애자도 아니었다. 캘런에겐 영화 속 주인공에게 던져질만한 거대하고 특별한 시련은 없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느끼기도 어렵다. 그러나 스치듯 보여지던 캘런의 상황들을 하나씩 주워담았을 때 나는 캘런의 짐이 너무 무거워 깊은 심해로 가라앉을것 같았다. 캘런의 우울이 깊다.
모두 소피의 상상이지만 어찌됐건 현재 소피의 방엔 캘런이 사온 카펫이있다. 왜 하필 카펫이었을까...
나는 감독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터키에서 카펫은 여자들이 혼수로 준비하기도하고
카펫에 새겨진 문양들은 악귀를 막아준다고 한다.
그리고 카펫은 예로부터 유목민들이 이동의 편리성을 위해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알라딘의 양탄자가...) 캘런은 어린딸을 내팽겨치고 잠시 생각했던건 아닐까...
카펫을 끌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용기를 얻고싶다.
혹은 카펫의 문양들이 자신을 보호해주면 좋겠다 혹은 자신은 이미 다 끝이났고 자신이 보호해주지 못할 소피에게 카펫의 문양이라도 남기고 싶었던건 아닐까?
이렇게 될줄 몰랐을거야. 희망도 가졌을거야.
더 나아갈 수 있을거라고 그러나 거듭된 실패에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의 후반전을 들여다 볼 용기조차 나지않는다. 거대한 패배의식에서 시작된 우울감은 캘런을 삼키고. 이 세계 어떤것에서도 흥미와 희망을 보는 눈을 앗아가 버린다. 마치 그 부분의 시신경만 마비되어버린것처럼. 그래서 버티지않았을까? 30살 까지만 살아보자고... 30살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