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십일월 Mar 11. 2024

남미새의 최후

소개팅 어플남

그는 사디스트였고, 난 마조히스트였다. 내가 마조히스트라니.  난 밤새 그의 말에 고분고분 복종했고, 시키는 데로 다 했으며 그의 괴롭힘도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와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너도 언젠가 2:1로 하게 될 거야.”

“미쳤어? 싫어 나는 1:1로 할 거야.”



질색팔색하다가 내심 그림을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생에 한.. 번.. 쯤은…



“그럼 아주 잘생긴 놈으로다가 붙여줘.”

“너 죽을래?”



어딘가 약 올라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난 허둥지둥 침대를 도망나왔다. 이런 놀음을 수십 번 반복하다 아침이 되었다.



“사과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는 식탁에 앉아 사과를 잘랐고, 그가 뒤따라 나왔다. 그는 내가 잘라 놓은 사과를 먹으며 말했다.



“안 먹는다며.”

“다음에 우리집에 오면 내가 요리해줄게.”

“오~”

“요리는 여자친구들한테만 해줘, 보통. 귀찮거든.”

‘여자친구 하라는 건가?’ 약간 미심 쩍었다. 나는 개수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거지도 해야 하는데.”



어젯밤 술기운에 먹은 참치라면의 그릇들이 개수대에 놓아져 있었다.



“내가 할게. 좀만 더 자고.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래라, 나 진짜 중요한 공모전 오늘 마감이어서 한 시간만 작업하면 되거든. 밥도 먹으려면 한 시라도 빨리 하는 게 나으니까.”



남의 집에서는 잠을 잘 못 잔다던 그는 코까지 골아가며 잠을 잤고, 나는 분주히 작업을 서둘렀지만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이야?”



게슴츠레 눈을 뜬 그는 배가 고프다 했다. 그리고 부엌에 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나는 멋쩍어 괜히 말을 늘어놓았다.



“원래 치우는 거는 집주인이 해야 하는 건데… 손님을 시키게 되었네.”

“그러면 다음에 네가 우리집에 오면 설거지 네가 할 거야?”



약간 짜증이 섞인 그의 말투에 나는 역시나 싶었다. 좀스럽군…



“너네 집에서? 음… 아무튼 내가 빨리 끝내야 밥 먹으러 나가니까, 네가 좀 해줘.”



나 또한 좀스럽군. 설거지를 시작한 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말 예전에 요리사였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진실인지 아닌 지를 판단하고 있는 내 행동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작업을 마치고 집 앞에 있는 타이 음식을 파는 식당에 가기로 했다.



“레깅스 입고 가.”

“알겠어.”



나는 그의 말을 또 고분고분 들었고, 레깅스를 입고 밖을 나섰다. 분명 어젯밤 함께 있을 때는 부족한 거 없어 보이는 그여서 어플에서도 이런 근사한 남자를 만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란히 그와 걸으니 그의 키가 좀 작게 느껴졌다. 



“너 키가 몇이라고?”

“175.”

“177이라고 하지 않았어?”

“175라고 하면 175cm 밑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럴 수 있지.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주문했고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다던 그는 국수를 흡입했다. 반면 나는 어색해 국수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러닝! 우리 다음에 만나면 같이 러닝 뛰러 가자.”

“음,.. 수영하자. 러닝은 힘들어.”



나는 쭈뼜대며 대답했다. 하룻밤 인연이 아닌 걸까? 나를 앞으로도 계속 볼 심상일까? 

식사를 마친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23.9.2.18:15 효원: 집 도착 ㅎㅎ]

[23.9.2.18:16 (이름없음): 그래 푹 쉬어.]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밤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친구는 극히 흥분했다. 나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대일 섹스 경험담이 있는 남자와 놀다니… 나는 그의 프사를 눌러봤다. 너무 멀끔하고, 에고가 넘치는 셀카 프사들… 이런 남성 괜찮은 걸까? 머리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심장은 머리와 달랐다.


다음날인 월요일이 되었고,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화요일에 문자를 보냈다. 



[23.9.4.11:09 (이름없음): 주말에 만날래?]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매력도가 -100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내가 보낸 문자로 평일 내내 그와 나는 온갖 야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또한 그는 내게 브라질리언 왁싱을 요구했다. 나는 그다음 날에 난생처음 왁싱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에 친구와 가기로 했던 수영 약속을 취소했다. 꽤 중대한 약속이었기에 친구는 매우 실망스러워했지만 나의 행복을 빌어준다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토요일이 되었지만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았다. 나는 정말 그와의 섹스가 궁금했기에 다 참을 수 있었다. 수영을 나가고, 작업을 하면서 그렇게 그를 주말 내내 기다렸다. 일요일 저녁이 되었다.



[23.9.10.19:23 효원: 출발]



“드디어… 드디어 한다!!!!”



기대감에 부푼 나는 그가 올 예상시간을 추정하고,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면서 그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한 시간 반이 지났다.


그가 도착해야 할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난 후였다. 


그렇다. 결국 그는 ‘출발’이라는 문자만 남겨둔 채 끝내 오지 않았다. 그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일요일 저녁이고, 그 누구도 주말에 보자는 얘기를 일요일 저녁이라고 알아듣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새끼는 그냥 잠수를 탄 거다.


‘친구와 수영장 약속도 깼는데…’


너무나 허망했다. 이것이 정녕 남미새의 최후인 건가?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너무나도 멍청했던 나의 기다림이 바보같이 느껴져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플에서 만난 남자 때문에 울고 있다니. 하지만 정말 무엇보다도 효원이랑 자보고 싶었다고!!! 평일에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날려버리고 결국 이렇게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다니, 통탄스럽다.”



나는 눈물을 훌쩍이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너 왜 울어. 지금쯤이면 나랑 연락 못해야 되는데? 섹스하고 있어야지. 왜 전화해서 울고 자빠졌어.”

“몰라. 출발이라고 해놓고 안 왔어. 나는 이거 때문에 친구랑 약속도 취소했는데.”

“김하늘 정신 좀 차려, 어플에서 만난 애 때문에 울긴 왜 울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 않던 친구의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나 정말 미련했구나.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내 자아가 성립될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알겠어. 안 울게. 나 잔다.”

“진짜 울지 마라. 잘 자.”



나는 친구에게 이런 바보 같은 꼴을 더 이상 보일 수 없어 최대한 괜찮은 척하면서 전화를 끊었고, 외로움에 허덕이며 경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23.9.10.22:14 (이름없음): 아, 인생 너무 외롭다. 난 왜 이럴까.]


어차피 답장 안 올 테니 부담 없었다.



띠링-



?



[23.9.10.22:15 (경연): 나 오늘 너희 동네 갔었는데.]


이전 08화 어플녀 김하늘의 사랑 방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