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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꿀꿀 Sep 14. 2023

사랑스러운 킬리만자로의 세 가지 맛

잔지바르 섬에서 배를 타고 다시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킬리만자로에 도착했다.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모시지역은 탄자니아의 북쪽 끝 국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냥 모시를 킬리만자로라고 불렀다. 모시에 도착하자 날씨는 여전히 따뜻했고 숙소 옥상에서는 킬리만자로산의 능선이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킬리만자로를 보다니!

킬리만자로 산 등반에 도전해 보라는 지인들의 추천이 있었지만 나는 나를 안다. 내 체력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산에 오르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명대사 중 공자의 이런 말이 나온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 나는 인자하기보단 지혜로운 쪽에 가깝고 그걸 증명하듯 내 이름에는 '지혜로울지'자가 들어가기 때문에(그냥 갖다 붙여봤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아무래도 못한다는 결론.

 어찌 됐든 그래서 킬리만자로는 멀리서 본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나는 가방을 챙겨 동네구경을 나갔다.

길을 걷다 보니 어딜 가나 아보카도를 쌓아놓고 팔았다. 아보카도를 키만큼 큰 자루에 넣고 끌고 가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다. 아보카도 수확시기에 운 좋게 도착한 듯했다. 길을 걷다 배가 고파 아보카도를 사 먹으려 과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앞에 섰더니 딸아이가 달려와 내가 찍고 있던 카메라를 끌어당긴다. 이름을 물으니 엔조라고 한다.

사랑스러운 엔조는 내가 과일을 사려 말을 할 때마다 옆에서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는 내가 과일을 사서 걸어갈 때까지 한참을 깡충깡충 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이곳의 아이들은 동양인인 나를 신기해하기도 하고,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놓고 좋아해 준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날 따라오는 엔조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엔조네 아주머니에게 산 아보카도를 까보았다. 아보카도는 한 알에 250원이었다. 잘 익은 아보카도는 말할 것도 없이 신선했고, 계란 노른자 같은 식감에 입안에서 묵직하고 고소하고 진하게 퍼졌다. 길거리에서 슬리퍼를 끌며 맨손으로 아보카도를 까먹다 보니 더할 수 없이 행복했다. 행복해.

다음날은 산 위의 원두농장에 갔다. 잔지바르에서 최고의 커피를 맛본 후 원두농장에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하던 찰나, 이곳은 산이 높아 원두농장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 위에 올라가니 높은 폭포와 푸르른 산이 펼쳐졌다. 이곳 원두농장에서는 원두를 채취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절구지에 찧어 껍질을 벗기고 채로 거르고 불 붙인 모닥불에 큰 팬에 로스팅을 했다. 산에서 채취한 원두를 그 자리에서 로스팅까지 한 원두커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까지 먹은 커피가 훈제연어였다면 이 커피는 갓 잡아 올린 생연어 그 자체. 엄마생각이 나 원두를 두 봉지 샀다. 이 산을 지나다 보니 이곳의 자연은 정말이지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려는데 길에서 한 아이가 바오밥나무 열매를 팔고 있었다. 바오밥 나무도 신기한데 바오밥나무에서 열매가 난다고? 아이에게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냐고 물어보니 씨앗을 먹을 수가 있다고! 나는 400원을 주고 당장에 열매를 샀다.

연두색의 조롱박처럼 생긴 딱딱한 바오밥나무 열매를 깨니 안에서는 10원짜리 동전크기의 부드러운 솜덩어리 같은 것이 여러 개 나왔다. 그걸 쪽쪽 빨아먹었더니 입안에서는 시고 단 하얀 가루들이 퍼져 녹아내렸다. 아마도 이곳 아이들이 즐겨 먹는 간식인 듯했다. 중독성이 있는 부드러운 이 맛! 인위적인 설탕맛을 모두 뺀 아주 작은 솜사탕뭉치 같았다.  다 빨아먹고 나니 강낭콩 같은 씨앗이 나온다. 이 작은 씨앗에서 저렇게나 큰 나무가 자라다니.

집에 오는 길에서는 저 멀리 우뚝 서있는 바오밥나무를 봤다. 거대한 바오밥나무가 광활한 초원에 서있으니 그저 평범한 나무 같아 보였다. 아무리 큰 바오밥나무도 고작 한그루 나무 같아 보이는데, 나는 이 초원 위에서 대체 얼마나 작은 먼지 같은 존재인 건가. 동화 <어린 왕자>에서는 바오밥나무가 행성들을 집어삼키지만 바오밥나무는 킬리만자로의 초원위에서는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토록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탄자니아를 도저히 떠나고 싶지가 않았지만 케냐로 떠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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