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끓어 넘친 태양은 부글거리고 낡은 버스는 삐걱거리고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작은 섬 잔지바르에 온 지 일주일째, 나는 다시금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장 2,3일 뒤의 계획도 없어 머무르던 호스텔도 하루씩 연장하던 나는 문득 섬의 북쪽인 능귀해변에서 내일 당장 수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이런 다소 충동적이고 계획 없는 여행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 계획도 없이 다녀? 무슨 올리*영에 들어가서 구경하다 나오듯이 아프리카여행을 간 거야? 아무 계획 없이 들어갔다가 좀 둘러보고 아, 구경 잘했다 하면서 나오고?”
너무나 정확한 묘사에 캭캭대며 웃었다.
맞다. 향수나 한번 뿌려볼까 하며 올리*영에 들어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여행하고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 하고 싶었던 게 내일모레는 하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여행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바로 교통수단과 숙소를 미리 예약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결국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달라 달라 버스(탄자니아 시내버스 이름이다)를 타고 무작정 능귀해변을 찾아가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버스로 이동하는 게 더 좋을 것도 같았다. 택시를 미리 예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 택시비는 3만 원이지만 버스는 1000원이면 간다는 거였다.
역시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머물던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며 직원에게 물었다.
능귀해변이라는 섬의 북쪽으로 달라 달라 버스를 타고 갈 건데, 버스정류장이 어디냐고 하니 모른단다. 정해진 정류장이 없다며. 버스 배차간격이 대략 몇 분이냐 물으니 직원이 그것 또한 없단다.
무슨 <이웃집 토토로>의 고양이버스도 아니고, 대체 정류장도 시간도 없는 버스를 어디서 찾아서 타라는 거야?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직원이 웃으며 덧붙인다.
This is africa!(여기 아프리카잖아!)
그렇다.
버스가 있으면 버스정류장과 정해진 시간이 있으리란 건 나의 상식일 뿐 이곳의 상식은 아니었다.
배낭을 메고 쉽사리 길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직원은 팁을 하나 알려준다. 툭툭이를 잡아 탄 뒤 능귀 가는 버스를 타러 간다고 말해보란다.
그렇게 툭툭이를 타고 몇 분이 지나자 기사가 나를 웬 시장바닥 한가운데에 내려주었다. 머리에 짐보따리들을 이고 진 여자들과 음료수나 옥수수 따위를 파는 상인들로 붐비는 정신없는 시장바닥에서 잠시 멍을 때렸다. 버스를 찾아 탄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헬로 잠보, 인사하고는 '나 능귀 가고 싶어'를 애타게 외쳐댔다. 지난 몇 개월간의 배낭여행 중 깨달은 건, 여행자가 간절하게 목적지를 찾아대면 어떤 경우든 간에 그 주변 어디에선가 아는 사람이 튀어나와 도와준다는 거였다. 이번에도 친절한 현지인 한 명이 자신을 따라오라며 버스가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가 타야 할 116번 달라달라 버스는 앞뒤옆이 모두 뚫려있고 위에는 천막을 걸쳐놓은 낡은 트럭이었다. 손바닥만 한 116번 표지판은 손으로 직접 써서 붙인 팻말 같았다. 내 배낭은 버스 천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졌고, 고개를 숙이고 버스에 올라탄 뒤 몇 시에 출발하냐 물으니 정해진 시간은 없고 사람이 모두 차면 그때 출발한단다. 역시 만만치 않다.
30분을 넘게 기다리니 어느새 사람들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꽉꽉 찼다. 그렇게 낡디 낡은 작은 버스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옴짝달싹 못할 만큼 끼여 앉은 상태로 버스는 출발했다.
뜨거운 햇빛에 버스 안은 찜통처럼 달궈지고,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원치않게 체온을 나누며 더욱더 서로를 덥게 만들었다. 버스가 속도를 내자 더운 흙먼지바람이 버스 옆으로 들어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는데 그 흙먼지바람마저 에어컨바람처럼 느껴져 감사할 지경이었다. 1시간 반동안 가야 하는데 핸드폰 데이터조차 잘 터지지 않아 할게 없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덕에 타는 듯 목이 말랐지만 만일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자연화장실(푸른 초원과 들판)을 이용해야 할 판이라 마음 놓고 마시지도 먹지도 못했다.
덥고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불평불만을 한참 하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포기하면 편해.
나는 거의 무생물처럼 아무 생각하지 않고 실려가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가까워졌겠다 싶을 즈음, 잠시 멈춘 곳에서 상인들이 트럭 사이로 내미는 옥수수를 사 먹었다. 옥수수를 받아 들었는데 어쩐지 종이가 익숙하다 했더니 한국신문지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낯선 외계행성에서 지구의 물건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워 호들갑을 떨었다. 도대체 어디 신문인가 하고 봤더니 그 신문의 정체는 서울신문. 아프리카 잔지바르 섬, 그것도 황량한 허허벌판의 길거리 옥수수판매대까지 진출한 서울신문의 보급력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가운 한국신문지를 꼭 쥐고 오백 원에 2개짜리 옥수수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옥수수는 데일 듯 뜨거웠고, 딱딱했으며 속이 건조해 마치 팝콘이 덜된 옥수수알갱이를 씹어먹는 것만 같았지만 그거라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버스를 탈 때부터 유일한 외국인인 내가 하도 목적지를 외쳐댄 덕에 능귀에 도착하자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내게 내리라며 능귀에 도착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버스를 같이 탔던 부부가 어차피 해변 쪽으로 가니 같이 가자고 데려다주겠단다. 이 친절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다르에스살람에서 놀러 왔다는 부부가 챙겨준 덕에 나는 무사히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능귀에 도착해서는 가까운 호스텔에 짐을 내려놓고 바다에 나왔다. 능귀해변의 모래는 아주 고왔다. 만져보니 지점토처럼 손 안에서 미끄덩 빠져나갔다. 바다에 풍덩 빠져보니 청량한 바닷물은 적당히 시원해 하루종일 데워진 몸의 열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끓어오른 햇빛과 모래바람을 헤치고 버스 타고 찾아온 보람이 있다.
그나저나.. 내일은 뭘 하지?
*글의 제목은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노래 제목과 가사를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