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by 초보 순례자

오늘도 열심히 걸은 당신!


이제 빨래를 할 시간!


매일매일 걷는 것 외에도 순례길에서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들이 꽤 많다. 그 반복되는 일상 중 하나가 빨래다. 최대한 몸에 무리를 주지 않고 걸으려면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것은 순례자로서의 필수 마인드 중 하나다. 그래서 관광지에 여행을 갔을 때 가지고 갈만한 예쁜 옷, 예쁜 신발 등은 배낭에서 빠지는 1순위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우리와의 동행이 허락된 옷은 걸으며 입는 옷, 잘 때 입는 옷뿐이었다.


옷의 개수가 적다 보니, 당연히 빨래를 매일 해야 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간혹 건조기가 있는 곳도 있었다. 건조기가 없는 곳에서도 3, 4시쯤 걸음을 멈추고 얼른 빨래를 시작하면 우리의 빨래가 뽀송뽀송하게 마르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가을에도 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자랑하는 축복받은 스페인의 날씨 덕분이었다. 특히, 알베르게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을 수 있는 빨래 줄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하루 종일 함께 걸은 우리의 옷들을 깨끗하게 빨아 말리는 시간이 아주 재밌는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KakaoTalk_Photo_2020-01-15-13-15-04.jpeg 남편은 빨래를 널어놓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시간을 참 좋아했다


이 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목욕재계를 한 후, 오늘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와 함께 걸은 옷들을 빨고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KakaoTalk_Photo_2020-01-15-13-15-20.jpeg 두꺼운 등산용 양말은 마르는데 오래 걸린다

옷과 양말들을 짱짱하게 털고, 빨래 줄에 널고, 옷이 날아가지 않도록 집게로 고정하고 한창 빨래 널기에 심취해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처음엔 남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 엄마 나이 정도로 보이는 순례자 한분이 얼굴 가득 미소를 발사하며 내 옆에 다가와 내가 빨래 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눈이 마주쳤을 때는 한번 웃어 보였으나, 그 뒤로 계속 빨래를 널고 있자니 어색함 속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고 제 이름은 ⚪⚪⚪다. 당신은 어디서 오셨나요?"


순례길에서 대화를 하게 되면 대화의 초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래서 내 입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숙련되어 있는 문장이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내 입에 익은 문장들을 쏟아내고, 나는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사실 당황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유럽인 순례자들은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낯선 사람과 길을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말은 먼저 건넸지만, 이 순례자가 아주 편안하게 익숙하게 대화를 이어갈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순례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고 다시 한번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어딘가로 가더니 종이와 연필을 들고 와서 "Austria"라고 종이 위에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일단 종이에 쓴 내용을 이해하려고 들여다보았고, 오스트리아라 적혀있는 것을 보고 “아~”라고 소리를 내며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했다.


"혹시 말을 못 하시나. 내 말을 이해하신 걸 보면 들을 수는 있으신 것 같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례자는 또 무언가를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분의 남편으로 보이는 다른 순례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내 대신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서 왔어요. 내 이름은 ***이고, 내 아내 이름은 *** 에요.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고 한국에서 왔어요.”


“혹시, 루게릭 병이라고 아시나요? 사실, 제 아내는 그 병에 걸려서 지금 입안 근육들이 녹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말을 못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나는 아까 아내 순례자가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미소를 짓고 연필과 종이를 가지러 갔을 때 보다도 더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편 순례자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 적막을 재빠르게 깨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덕분에 나는 나의 당황스러움을 조금이나마 감출 수 있었다.


“우리는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는데, 당신도 산티아고로 가나요?”


“네, 저도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어요.”


“혹시, 당신도 크리스천(Christian, 기독교인)인가요?”


“네, 맞아요. 저도 크리스천이에요.”


“그렇군요. 우리도 크리스천이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좋은 여행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나는 후다닥 남은 빨래를 마저 널고, 남편이 짐 정리를 하고 있는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남편에게 방금 내가 겪은 가슴 먹먹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드는 이 일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방금 만난 오스트리아 부부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저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점점 근육들이 위축되어 가는 아내를 데리고 이 길을 걷고 있는 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내분은 아픈데도 어떻게 이 길을 걸을 용기를 내셨을까?"


우리의 대화는 질문으로만 이어질 뿐, 어떤 대답도 없었다. 감히 그분들의 마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남편이 정리하고 있던 짐 옆에 놓여 있는 오렌지가 보였다. 알베르게 체크인하러 오는 길에 사 온 것이었다.


남편에게 대뜸 말했다.


“이 오렌지 좀 저분들 갖다 드릴까요?”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저분들의 아픈 마음을 내가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지만,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뭐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렌지를 주섬 주섬 챙기던 나는 결국 그 오렌지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안 드리는 게 좋겠다고...’


남편은 묻지 않았다. 왜 내가 오렌지를 갖다 드리겠다더니 1분도 안되어 마음을 바꿨는지.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입 안 근육이 녹고 있어 말을 하지 못하시는데, 음식물을 먹기도 힘드신 게 아닐까? 괜히 이 오렌지를 드렸다가 지금의 아픈 현실이 더 많이 느껴지시지 않을까…"


그날 밤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방 안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까 알베르게 2층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맞아, 그래서 아까 1층에서는 순례자들이 다 같이 식사하는 소리에 왁자지껄했는데, 그분들만 2층에 단 둘이 계셨을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혹시 내가 했던 배려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된 적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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