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준 편지』| 김수우, 김민정 | 열매하나
질문을 소홀이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눈부신 진실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할까요.
속표지를 넘기고 나면 등장하는 문장이다. 보통 다른 책의 문구나, 유명인사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책이 많은데 『나를 지켜준 편지』는 책속의 문장을 맨 앞에 실었다. 마치 이 책의 가장 큰 물줄기라는 듯이.
작가와 편집자의 의도가 통했던 걸까. 나는 단 번에 그 문장에 마음을 뺏겼다. ‘질문’이 눈부신 진실과 따뜻함을 가져올 수 있다니! 본문을 읽기도 전에 좋아진 책, 아니나 다를까. 올 여름 얼마나 뒤적거렸는지 책이 금새 낡아버렸다. 뒤늦게 비닐로 싸두었지만 귀퉁이마다 찍힌 것은 복구할 길이 없었다. 책 내부도 밑줄 투성이였다. 비슷한 분량의 다른 책에 비해 두 배 넘게 밑줄과 메모가 많았다. 흔히 이런 걸 <인생 책>이라고 부르던데!
골목책방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게 책방 주인에게 추천받은 『나를 지켜준 편지』는 20대 청년과 50대 시인이 나눈 편지를 엮은 책이다. 한 세대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대채 어떤 이야기를 담아 편지를 주고받은 걸까?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기대감에 차올랐다. (재밌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주변에 추천할 때마다 모두 청년과 시인이 남자인 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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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보낸다는 핑계로 “선생님”하고 부르며 시작하는 편지를 쓸 수 있음이 내 청춘의 커다란 축복이었다.
김민정 씨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삶의 길목 길목에서 의지할 스승, 선배, 멘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비슷한 시기에 홍승완 작가의 『스승이 필요한 시간』을 읽었기 때문에 더더욱 크게 공감했다. 나이가 들며 의지할만한 정신적 지주 혹은 소울메이트의 존재를 절실하게 느끼는 바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들이 있다. 서로 의지하는 이가 있고, 내가 상대를 혹은 상대가 나를 더 의지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댈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날들. 그것은 시인의 표현처럼 눈부신 기적이다.
좋은 글이나 큰 풍경을 보면 꼭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던, 민정 씨도 새 울음 가득한 오솔길이다. 살면서 서로 디딤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눈부신 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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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청춘은 어떠셨나요? 과연 청춘이란 무엇이며, 청년이 가꾸어 갈 행복의 모양이란 어떤 것일까요? (김민정)
편지의 시작 즈음, 김민정 씨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상경한 20대 청년이었고, 김수우 시인은 부산에서 백년어서원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는 50대 중년이었다. 편지와 편지 사이에는 무려 10년의 세월이 담겨있었다. 청년은 취업을 위해 고향(부산)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고, 인턴을 거쳐 직장을 얻고 이직을 한다. 언니들을 떠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도 하고,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는 고민까지 나눈다.
굴곡이 많은 청년에 비해 중년의 시인은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청년의 질문과 고민에 애정과 삶의 지혜를 담아 용기를 북돋우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시인은 한없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하다. 글에서 그런 표정을 읽을 수 있다니. 그 위로와 조언에 나도 이렇게 감동이 밀려왔는데 당사자인 민정 씨는 얼마나 벅찼을까.
어쩌면 청춘이란 자기 존재감을 위해 건강한 전사로서 나서는 마음인지도 몰라요. 이 전사가 드는 아름다운 무기가 순수입니다. (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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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라는 것이 상대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내가 좋은 사람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일종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위로를 받는 쪽도, 하는 쪽도 소모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위로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라는 범주에 있는 이들을 묵묵히 응원하는 것이 참된 위로라면 제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김민정)
많은 글쓰기가 그렇지만 특히 편지는 생각을 추스르는 힘을 가진 글쓰기라고 단언한다. 내가 수많은 이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던 근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상대가 어떤 대답이나 위로, 조언을 해준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편지 안에 담겨 있다고 나는 경험으로 믿는다.
그런 점에서 민정 씨도 비슷했다. 질문했지만 바로 답을 찾아갔고, 선생님의 답변이나 충고를 담담히 새긴다는 걸 전달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삶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야 하는 이유는 연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호모 심비우스>를 언급하는데 이는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다른 인간과, 자연과, 과거 혹은 미래와 공생해야 하는 우리에게 질문이라는 견제가 없다면 인류는 독주 혹은 폭주하며 자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위로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은 민정 씨가 고마웠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고, ‘과연 인간은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인가’하는 회의가 발목을 잡을 때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이 두려운 건 그 말이 의미가 비껴난 채 나에게도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화살이 되기도 하니까요.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린 소중한 것은 아낍니다. 말을 아끼는 것은 말의 가치를 안다는 말이지요. (김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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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한 줄 서로에게 존중과 존경을 담아 드러내는 두 사람의 속내가 깊이 울렸다. 두 번을 읽고, 밑줄 그은 부분을 필사하고, 심지어 처음으로 책 전체를 녹음까지 했다. 운전하면서 혼자 들으려고 말이다. 소리 내 읽으면서 이전과 다른 글귀도 다 못 찾은 보물찾기 쪽지처럼 찾아냈다.
주변에 알려주고 싶었다. 참 괜찮은 책을 발견했다고. (2019년에 나왔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손꼽을 정도라고. 하지만 책을 추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나 음악을 권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내용이 어렵지 않아야 하고, 보편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며, 일단 두껍지 않아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조건들이 있지만 『나를 지켜준 편지』는 그런 조건에 90% 이상 부합하는 책이라고 판단했다.
먼저 남편에게 권했다. 슬쩍 책을 들춰본 남편은 내 권유를 흔쾌히 수락했다. 특히 김민정 씨의 군더더기 없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여러 명의 친구들에게도 알렸다. 단톡방에 책표지를 넣어보기도 하고, 만나는 친구들에게 책을 보여주며 꼭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누가 보면 작가 둘 중에 나의 지인이라도 있는 것처럼 열심히 홍보했다. 많은 책을 읽었었지만 편집자와 출판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처음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그 책 추천해준 책방 사장님께 선물이라도 드려야겠다. 당신 인생 책을 만났으니.”
그래, 맞다. 내 마음 담긴, 부담스럽지 않을 선물을 준비해서 곧 책방에 한 번 들러야겠다. 그리고 『나를 지켜준 편지』를 몇 권 더 사서 기념일 맞은 친구에게 선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