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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Oct 24. 2021

릴리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릴리에게, 할아버지가』| 앨런 맥팔레인 | RHK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덜 잔인하고 덜 혼란스럽고 덜 불공정한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릴리는 참 좋겠다. 할아버지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부러운 릴리다. 그런데 편지가 책으로 세상에 나와 수많은 독자들이 릴리를 궁금해 하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일까. 


스물여덟 통의 편지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일까?’. ‘사랑하면 결혼해야 할까?’, ‘왜 신은 인간의 고통을 보고만 있는 걸까?’,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 걸까?’ 등등의 질문이 적힌 목차를 보면 과연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흔히 이야기할만한 소재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흔하다고 할 수 없어도 아예 못할 이야기도 아니다. ‘라떼는...’이라는 꼰대스러운 말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오늘 날씨는 말이야,’나 ‘오늘 길에서 오래전 알던 친구를 만났는데...’와 같은 안부를 전하는 편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엘런 할아버지의 대답을 일부 들여다보자.  


“네가 생각하는 ‘여성스러움’은 특별한 역사의 구성물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잉글랜드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자신의 육체를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투표를 하고, 마음에 드는 남편을 선택할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과거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런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p.23) 


여기서 변수는 ‘여성’, ‘잉글랜드’, ‘과거’다. 그렇다면 남성, 잉글랜드 이외의 나라, 현재와 미래에는 어떤 ‘나’들이 존재할까를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릴리가 아닌 독자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면 꼭 결혼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도 마찬가지다. 결혼의 의미, 국가와 민족마다 다른 결혼 문화, 점점 변해가는 결혼에 대한 관념 등을 언급한다.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보고, 결혼과 같은 것으로 ‘관계’를 고민해본 뒤에는 신, 불평등, 노동, 인류의 미래 등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해간다. 존재에 대한 철학, 인류의 역사, 공존의 의미와 존속 등을 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할아버지라니. 어쩌면 그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이 태어나 해온 일 중에 가장 뜻 깊고, 어려우면서, 뿌듯한 일이 아니었을까. 


릴리의 할아버지, 앨런 맥팔레인은 영국에서 역사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중국, 일본, 네팔 등을 여행하며 동양에 대한 이해도 깊이 쌓은 인류학자다. 그가 손녀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릴리가 인간답게, 또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대상이 대상이니 만큼 편지에는 진심이 담길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진심은 독자들에도 여과 없이 전달될 것이라는 게 이 책의 출판 의도이자 목표로 보인다. 


가능한 특정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솔직하게 적으려 노력했단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많은 책을 참고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내가 경험으로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1)


그 때문에 마치 나의 할아버지께 좋은 말씀을 듣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마치 공부를 하듯 편지글에 붙인 인덱스스티커가 무려 50장이 넘었다. 다음은 하나하나 기억에 마음에 담고 싶었던 문장들이다. 


우리는 마치 국민국가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라고 하는 양 다른 나라 사람과 전쟁을 하고 이민자를 차별한다. 


평등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우리보다 나은 사람과 평등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혜택(산업혁명)을 받아 고단한 육체노동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된 사람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인류학자 앨런 할아버지의 시선과 신념은 배부르고, 따듯하게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거시적 관점은 인류와 공동체에 대한 통찰로 다듬은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앨런 할아버지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외계인 시점을 강조한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은 이렇다. 

“릴리야,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생각해보렴.”


한편 에필로그의 마지막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인용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조그만 녹생 행성이 있는데, 거기서 원숭이에서 진화한 행명체 한 중류가 살고 있다. 그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원시적이어서 아직도 디지털 손목시계가 대단한 발명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렇듯 나를 타자화하고, 인류를 객관화하는데서 출발하는 삶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덜 잔인하고 덜 혼란스럽고 덜 불공정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발판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 릴리도 잘 받았겠지? 


릴리가 부럽다고 이 글을 시작했는데, 릴리와 릴리 할아버지께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나와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커다랗고 따뜻한 눈을 뜨게 한 감사다. 앞으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어떤 각론을 마주할 때 앨런 할아버지의 편지를 곱씹으며 전지적 우주인시점에서 인류의 안부를 물는 습관을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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