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 정한샘, 조요엘 | 열매하나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나
자신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일을 발견하게 되면
전보다 그 책이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읽고 쓰며 성장한 엄마와 딸의 책 편지’라니. 단번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부러움이 앞서서였을까? 책을 사 놓고 꽤 오랫동안 읽지 못했다. 한동안 제목을 곱씹고, 책 표지를 눈에 담기만 했다. 겨울에 나온 책을 봄이 오는 길에 들여서 여름이 되어서야 펼쳤다.
-
책은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전반부는 엄마이자 딸이기도 한 정한샘 작가의 짧은 기록을 담았다. 책을 읽어주지 않는 엄마지만, 어린 시절 엄마 몰래 책을 읽던 아이였다는 고백 같은 글이 차분하게 다가왔다. 삶을 관통하는 책이 던져주는 세상의 질문, 그 앞에 홀로 서 있던 엄마가 이제는 쌍둥이 딸과 함께 ‘우리’라는 이름으로 마주 앉게 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이제 순수한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보려 한다.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고 하며 분노도 하고 연대도 한다. 책 안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을 내 일상으로 끌어당겨 적용해 보려는 노력도 한다. 사는 방식이 읽을 책을 결정해 주기도 하고, 읽은 책에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p.35)
내가 책을 대하는 방식과 꼭 같은 마음이라 밑줄을 그었다. 정한샘 작가의 독백은 길지 않았다. 곧 딸과 엄마의 대화가 이어졌다.
-
『나니아 연대기』는 무척 두꺼운데, 이 책에는 얼마나 많은 공백이 있을까요? 그런 공백들을 상상하며 읽으면 두꺼운 책이어도 지루하지 않고 읽는 시간이 참 빨리 가요. 엄마도 책 속 공백들을 상상한 적이 있으세요? (p.57)
딸과 엄마의 책에 대한 대화란 딸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을 엄마에게 편지로 보내면 엄마는 답장을 해주는 식이다. 하지만 같은 책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딸이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 책속의 공백을 상상하며 읽는 것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를 이어받아 『거울로 드나드는 여자』라든가 『거울 나라의 엘리스』 등을 언급하며 책 대화를 확장한다.
대화의 주제는 상상력으로 시작해 용기, 공감으로 뻗어간다. 폭력과 편견에 맞서고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고 전염병 시대의 현실까지 짚어보는 모녀의 대화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딸은 책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엄마는 먼저 만났던 사회적 인간에 대한 통찰을 나눈다. 이들 사이에 놓인 책은 어려운 철학서가 아니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애쓰려한다는 점에서 모녀의 책 대화는 철학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책을 읽고 나니 부러움은 더 커졌다. 집을 팔아 온 가족이 세계여행을 했다거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 유명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부러워도 아예 범접할 수 없다는 심리적 안도감이 깔리기 십상이지만 책으로 뭔가를 해보는 것은 현실가능이라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한샘 작가 자신이 ‘주변의 도시 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별난 엄마로 자리매김’ 했다고 언급한 것처럼 홈스쿨링이라는 특수한 상황도 넘볼 수 없는 선망이긴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내가 발견한 희망의 문장이 있었으니.
이 책을 읽는 분들도 어떤 계기로든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으시길 기대한다. 그 안에서 서로가 놓쳤던 마음들을 발견하기를 바라본다. (프롤로그 중)
딸들에게도 간혹 엽서나 쪽지를 썼다. 최근에는 아이들 앞으로 편지통도 마련했더니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꽤 신나했다. 편지 쓰기라면 또 자신 있는 나니까, 게다가 이미 종종 아이들에게 글로 말을 걸어왔던 나니까, 책 이야기를 글에 담아보면 되겠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의 두 작가와 같은 대화가 우리 모녀들에게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나는 아이들에게 답장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책에서 길어 올린 질문에 어쩌다 한 번은 스스로에게 대답해 볼 수 있는 기회 정도는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나는 질문전달자가 되어볼까 하는 것이다.
갱년기와 사춘기가 만나면 갱년기가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상당히 혹독하다고 한다. 나도 곧 앞둔 일이라 두려움이 크다. 그런데 정한샘 작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이들과 책 이야기를 글로 전하다보면 갱년기와 사춘기 전쟁을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