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서른 벌의 옷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옷, 나를 설레게 하는 옷만 남기자는 기준이 생겼다

by 메이 이혜림

“옷장은 옷으로 꽉 찼는데, 막상 입을 옷이 없네.”


웃픈 현실. 공감하며 웃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옷장 가득한 옷을 보며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매일의 아침을 보냈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 한쪽 벽면에 옷으로 꽉 찬 행거가 있었다. 아무리 청소해도 방안은 옷 먼지로 가득했다.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며 비우고 남은 옷은 100여 벌이었다. 9평 신혼 원룸에 가지고 들어가기에는 여전히 많은 옷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중에 절반은 버리기로 했다.


몇 년간 전혀 입지 않은 옷도 있었고, ‘이런 옷이 있었나?’ 싶은 낯선 옷들도 있었다. 비싸거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옷이라며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다. ‘얼룩이 묻었지만 시간 많을 때 손봐서 입어야지, 조금만 수선하면 괜찮을 것 같아.’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있는 옷들도 많았다. 처음 시작은 그런 옷들을 비우는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이유들로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옷들을 비우는 것. 그러고 나니 내게 60벌의 옷이 남았다. 계절에 맞춰 절반은 옷걸이에 걸고, 나머지는 리빙박스에 넣어 보관했다.


하지만 60벌의 옷 중에서도 매일 입는 옷들만 입었다. 그래서 한번 더 비우기로 결심했다. 나는 왜 그동안 입지도 않는 옷들을 쟁여가며 살았을까. 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 하고, 늘 유행하는 옷과 새로 산 옷들을 입어서 남들 눈에 그럴듯해 보이고 싶었던 욕망은 아니었을까. 그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까 옷장 정리가 쉬워졌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내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매일 동일인을 만나지 않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타인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큰 충격과 함께 깨달음이 왔다. 그 뒤 옷을 처분하는 기준이 생겼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옷들만 남기자. 매일 입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나를 설레게 하는 옷만 남기자.’


그 기준으로 만져보고 입어보면서 옷을 가차 없이 줄여나갔다. 그렇게 내게 남겨진 옷은 4계절 총 30벌. 처음으로 옷장에 여백이 생겼다.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옷들만 고급 부티크처럼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장을 갖게 되었다. 모두 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옷들이라서 귀하게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 오래오래 입고 싶어서, 옷걸이도 통일감 있게 모두 원목으로 바꾸고 옷들 사이의 간격도 떨어트려 주어서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 번 입은 뒤에는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깨끗하게 세탁을 하고, 환기를 시켜준 뒤에 다시 옷장에 걸어준다. 대충 입지 않고 정성껏 관리를 하면 입었을 때 확실히 태가 다르다.


‘설렘’을 기준으로 처분하는 습관이 들자 옷에도 유효기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옷, 그 신발, 그 액세서리. 그 물건들이 내게 잘 어울리고 내가 잘 쓸 수 있는 때는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비싸게 샀다고 아껴입지 않고 매일매일 닳도록 입고 쓰고 있다. 몇 년이 지나 이 설렘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아끼다 똥 된다. 내 취향은 언제나 변할 수 있음을 의식한다.


내 옷장의 옷은 언제나 서른 벌 언저리에서 더 늘지 않도록 신경 쓴다. 너무 많은 개수의 옷은 관리하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가지고 있는 옷을 잘 활용해서 입으려고 하고, 옷 한 벌 사더라도 신중하게 고심해서 구입한다. ‘한 달간 이 옷 한 벌만 입으라면 입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선뜻 예스!라는 대답이 나오는 옷만 구입한다. 과거에는 중구난방 여기저기 예뻐 보이는 옷들을 몽땅 다 샀다. 가격이 싸면 쌀수록 신이 나서 더 많이 샀다. 그랬더니 실패도 많고, 몇 번 안 입었는데 금방 손상되고, 질리기도 쉽게 질렸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마음이 불편해 매번 옷장은 입지 않는 옷들로 포화상태였다. 이제는 비싸더라도 입었을 때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내 기분이 좋아지는 옷. 그런 옷만 엄선해서 구입한다. 늘 내가 소유하는 옷걸이 개수만큼만 옷을 소유하고, 새 옷을 걸 옷걸이가 없다면 사지 않는다.


옷의 개수가 적어진 이후로 철이 바뀔 때마다 필수 코스였던 옷장 정리도 무척 간편해졌다. 정리라고 딱히 할 수도 없는 게, 리빙박스에 들어있던 계절 옷과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의 자리를 서로 바꿔주고 간절기 옷은 옷걸이에 걸어둔 채로 두는 것이 옷 정리의 끝이다. 아무리 천천히 해도 10분이면 끝나는 옷 정리. 하하 예전에 옷이 빼곡하게 있을 때에는 계절 바뀔 때마다 옷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고 주말에 큰맘 먹고 해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몸에 힘 빼고 설렁설렁 해도 금방 정리가 끝난다.


오늘 아침,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게 느껴졌다. 아침 먹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옷장 정리를 마쳤다. 며칠 전 남편이 선물로 원피스를 사준다고 했다. 틈날 때마다 어떤 옷을 살까 열심히 골랐는데 옷장 정리를 하다 보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이미 내가 원하는 종류의 옷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예쁘게 개어있던 옷들을 상자에서 꺼내어 옷걸이에 걸면서 문득 설렜다. 얼른 입고 나가고 싶어서. 더 이상 사고 싶은 옷이 없다. 이미 내 옷장에는 내가 입고 싶은 옷들로만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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