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
우리 가족은 주로 거실에 모여있다.
엄마를 필두로 가족 모두 아끼는 것이 워낙 몸에 배어서,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 한번 켜는 게 쉽지 않고 겨울에도 내복은 기본에 오리털 파카까지 껴입을 때도 있을 만큼 난방도 거의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냉난방을 할 때는 식구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있고 그 장소는 주로 거실이 된다.
봄가을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각자 방에 들어가 형광등을 켜는 것 역시 드문 일이다.
아끼려다 보니 모여있는 건지, 모여있다 보니 흩어지는 게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는지 뭐가 우선이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자기 위해 방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가끔은 거실에서 잠이 들 때도 있을 만큼 집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거실에서 보낸다.
초등학교 시절,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올 때까지는 각자의 방이 없었기에 딱히 갈 데도 없었다.
큰 방 하나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밤이면 이불을 깔고 자고, 아침이면 다시 장롱으로 이불을 넣고 같은 공간에서 놀고 쉬고 모든 시간을 함께 했다.
이후 몇 번의 이사를 했지만 시험기간이라서 발에 불 떨어져서 공부를 해야 하거나 직장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끌고 오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늘 거실에서 TV를 함께 보았다.
누군가 별일 없이 방에 들어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나? 어디가 아픈가?" 할 정도이다.
문을 잠그는 것은 고사하고 닫은 적도 거의 없었다. 한때는 '나만의 공간이 없어, 비밀이라곤 있을 수가 없는 집이야.' 라며 답답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거실에서 먹고 놀고 누워있다.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은 가족이다 보니, 비교적 대화도 많은 편이다.
가족들과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함께 보며 웃는 것도 좋고 친구들과 깔깔대며 수다를 떠는 것도 좋지만, 엄마와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재미있다. 가끔씩 눈물이 찔끔 날만큼 배꼽 잡고 웃을 때도 있지만, 아주 작은 얘기라도 좋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엄마의 이야기, 내가 아이일 때 곧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의 엄마에게 있었던 일들.
외할아버지가 맏딸인 엄마를 다른 이모와 삼촌들 모르게 따로 불러내 경양식 집에 데려가셨다거나, 아빠와 데이트할 때 청와대 뒤쪽에 있는 북악산을 갔었는데 그땐 개방이 다 되지 않아 얼마 못 가봤다는 얘기 등등.
아직도 철없이 엄마에게 투덜대고 짜증 내는 미운 오리새끼지만 그래도 이제는 좀 컸다고, 우리가 어렸을 때 있었던 엄마 아빠가 힘들었던 일들을 듣는 것도 왠지 뿌듯하다. 아무리 현실이 고달파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부모님이었던 걸 잘 알기에, 시간이 흐른 뒤 지금에서야 가능한 이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
"그 인간이 그랬단 말야? 속상해."
가끔은 엄마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뒤늦게 열불이 터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쩜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었는지. 나에게는 그저 행복한 시절이었는데, 그걸 지켜주기 위해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던 엄마에게 고맙단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안쓰럽고 죄송하다.
영화를 보면서 "저 배우가 그때 그 영화에도 나온 배우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도 받았다더라" 배우에 얽힌 뒷이야기를 찾아보고 엄마에게 알려주는 것도 좋다. 스마트폰에서 두어 번만 검색하면 나오는 영화, 배우, 감독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것도 재미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면 '실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에서 바꾸어 표현한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도 흥미롭다.
영화관에서는 아무래도 조용히 해야 하고 그 때문에 좀 더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같이 보는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재미는 덜하다.
집에서는 다른 일을 해야 하거나 화장실을 가야 할 때 잠시 멈췄다가 보기도 하고, 너무 졸리면 아예 중단하고 다음에 이어서 볼 수도 있다. 마음껏 대화하며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엄마와 볼 영화를 선택할 때에도 기본적인 영화에 관한 내용들을 파악하지만, 영화를 보며 새롭게 궁금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자주 이런 것들을 찾아본다.
엄마는 패션 인테리어, 음악 미술, 정치 경제, 환경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훨씬 더 호기심이 많고 관심사가 넓다 보니, 영화 한 편을 보다 보면 이것저것 찾아보고 나누는 얘기가 끝이 없다.
가족 특히 엄마와는 어떨 땐 숨기고 싶고 별의별 민망하고 창피한 일까지 다 공유하지만 어떨 땐 정말 할 얘기가 하나도 없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편한 사이기에 굳이 할 말을 만들어서 찾지 않기도 하지만.
평상시 대화하는 주제는 뻔하고 비슷할 때가 많다. 불평불만, 나 힘든 푸념만 늘어놓나 싶어 아예 말을 하는 게 꺼려지기도 하다. 그럴 때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면 대화거리가 풍부해진다.
물론,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는 시간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기껏 열심히 골랐는데 재미가 없다거나, 대강의 스토리만 살펴봤을 때는 예상치 못했던(주로 야한) 장면들이 중간에 불쑥 나오면 당황스럽다.
<오 마이 그랜파(2016)>는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서도 많이 소개되었고, 로버트 드 니로(1943~)라는 명배우가 나오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택한 영화이다. 할아버지와 손자와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내용을 기대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온갖 외설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극 중 손자 제이슨(잭 에프론, 1987~) 못지않게 관객인 우리 모녀 역시 당황했다.
심지어 로버트 드 니로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 당분간은 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는 결국 재미없다며 중간에 잠드셨고, 나만 홀로 남아 '대체 이 영화의 결론이 뭐야?' 조금은 뿔난 마음으로 끝까지 봤으나, 그다지 공감 가는 결론도 아니었다. '틀에 갇힌 나머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손자를 위한 할아버지의 마음'이라고 굳이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억지스럽다고 할까? 뒤늦게 포스터를 찾다 보니, 원제가 <Dirty grandpa>였다. 이런, <오 마이 그랜파>라는 영화 제목을 보고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가슴 벅찬 명대사 "오 캡틴, 마이 캡틴"을 떠올렸다는 게 허무했다.
<굿럭척 Good luck Chuck (2007)>은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제시카 알바(1981~)가 나오며,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들어서 기대하고 본 경우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지 채 5분이 되지 않아 결국은 엄마가 먼저 자리를 뜨고 방에 들어가 주무셨다는 슬픈 결말이... 영화를 보다가 엄마가 자리를 뜬 유일한 영화였다.
아무리 지루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끝까지 보는 우리 엄마인데.
아예 원치 않는 영화라서 자리를 뜨거나 주무시는 건 차라리 낫다.
함께 보는 줄 알고 조잘조잘 영화에 대해서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엄마의 답이 없어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을 땐 어찌나 배신감 느껴지는지.
사실 반대의 경우도 많은데, 영화를 보다가 내가 자는 건 그렇게 꿀맛이면서 엄마가 자는 건 왜 그렇게 부아가 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엄마와 나누는 시간, 그리고 대화는 즐겁다.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되는 건 역시 부모님과 좋은 시간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다른 건 뭐든 지금이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지만, 이것만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재미도 의미도 없는 시간을 보내는 데는 관대했으면서, 막상 가장 소중한 분들에게는 왜 그렇게 야박했는지.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다.
엄마와 나눈 대화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잠깐 웃고 넘어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두고두고 생각나고 미소가 지어지는 따뜻한 이야기들.
그런데도 TV 프로그램 볼 때 엄마가 말이라도 걸면 TV에 빠져서 건성건성 대답하고 귀찮아하는 건 여전하니 원.
뭣이 중한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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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기,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CC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