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여전히 엄마를 모른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료는 커피, 뭘 먹어도 마지막에 김치 한 조각 없으면 개운치 않을 만큼 김치를 좋아하고, 디저트로는 치즈케이크와 호두파이.
엄마들은 자식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만큼 꿰고 있지만, 막상 자식들은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고들 한다.
한때는 스스로에게 과하게 후했던 나머지, '난 달라. 다른 애들보다 엄마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는걸.' 이라며, 기껏해야 열 개도 되지 않는 몇몇 정보를 알고 있다고 기고만장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나마 알고 있던 몇 가지가 하나하나 깨지고 있다.
위염 때문에 엄마가 커피를 못 마신지는 이미 십수 년을 훌쩍 넘었고, 언젠가부터 치즈케이크와 호두파이를 먹으면 소화가 안되어 작게 한 입 정도만 드셨다. 역류성 식도염이 생겨 신 음식을 먹으면 오랫동안 고생하셨고, 그 결과 그렇게 좋아하던 김치도 조금만 시어버리면 못 드시게 되었다.
그나마 음식 취향이 바뀐 것은 이런저런 질병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나 있지.
놀랍게도, 엄마가 영화감상을 이렇게 좋아하고 즐기는지 사십 년을 넘게 몰랐었다.
대학 다닐 때였나, 엄마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영화관 간지 얼마나 됐어? 엄마도 20~30대에는 영화관 자주 갔었어?"
그때의 난 많게는 매일,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영화를 봤다. 그렇게 개봉 영화를 비롯해서 각종 이름난 영화들을 보고 다니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왜 영화를 안 보지? 영화를 안 좋아하나?'
그러면서 나만 마치 뭐라도 된 듯이 영화를 엄청 사랑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인 냥 착각했다.
"우리 영화나 볼까?"
문득 엄마가 말씀하셨다.
코로나로 집에 머물게 된 시간이 많아지면서, TV를 하루 종일 켜놓다 보니 웬만한 건 다 본 프로그램이고 지루하고 심심했던 차였다. 그렇다곤 해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몰라도 영화를 집에서 보는 건 왠지 집중도 안되고 재미가 없어서 영화를 일부러 골라가며 본 적은 거의 전무했다.
하지만 엄마가 먼저 뭔가를 제안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영화를 찾았다.
개인적인 취향은 블록버스터나 히어로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친구나 지인들과 영화관을 가면 보통 그들의 선택에 따라 영화를 보는 편이다.
하지만 엄마와 갈 때면 주로 남들이 안 보는 잔잔한 영화를 택한다. 많은 상영관에서 <어벤저스>를 한다 해도, 작은 상영관에서 시간 간격도 띄엄띄엄 드물게 하는 로맨스 영화를 찾아본다. 감독도, 배우도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영화라고 해도 상관없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아무리 찾아도 이런 영화가 없으면, 아예 한두 편만 상영하는 더 작은 영화관을 찾아간다. 이렇게 엄마와 내 영화 취향은 거의 비슷했기에, 엄마가 재밌게 볼만한 영화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함께 본 영화 중 엄마가 재미있어 한 영화로는 <로맨틱 홀리데이(2006)>가 생각난다.
LA에서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아만다(카메론 디아즈)가 영국의 시골 마을에 사는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와 서로의 집을 바꾸어 생활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틱 코메디물이다. 두 명 모두 이성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다른 나라, 다른 집의 새로운 공간에서 힐링하기로 한다. 아만다는 아이리스의 오빠 그레엄(주드 로)과,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친구인 마일스(잭 블랙)와 만나 차츰 감정을 키워나간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따뜻한 로맨스 영화. 큰 기대 없이 봤었는데, 엄마는 상당히 만족하셨다. 가끔 TV에서 이 영화가 방송될 때마다 "아, 저거 재밌었는데"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가끔은 예상을 빗나갈 때도 있다.
나에게 <우먼 인 할리우드(2018)>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특히 벡델 테스트가 놀라웠다. "영화 속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해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가? 단지, 대화의 내용은 이성관계 즉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는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이다. 영화의 내용과 캐릭터 대부분이 남성 중심임을 이런 기준을 통해 수치로 증명한 것이다.
이 외에도 지나 데이비스(1956~), 케이트 블란쳇(1969~), 리즈 위더스푼(1976~) 등 이름난 할리우드의 여배우들이 이야기하는 영화계 뒷이야기들은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웠다.
엄마도 처음에는 재미있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기를 포기하셨다. 재미가 없거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빠르게 말하는 여배우들의 인터뷰가 워낙 많았는데, 그 지문을 따라가기 벅찼던 것이다. 그 정도도 엄마가 보기 힘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노화를 슬슬 느끼기 시작한 나로서는 영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일 때는 코끼리코 열댓 번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고개만 빨리 돌려도 어지럽다. 이러한 신체의 생리적 변화에 서글프면서, '더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게 점점 더 많아지고 생활 반경이 좁아지겠구나' 생각을 하면... 슬프다.
나도 그렇지만 엄마는 유독 겁이 많아 공포 장르는 시도조차 안 하고 액션이나 드라마도 너무 잔인하고 피 튀기는 건 별로다.
다들 감동적이라는 <시티 오브 조이(1992)>*를 보고도 이 영화를 선택한 걸 한동안 후회했다. 감동적이라고 해서 영화가 지루하다거나, 보고 나서 계속 찝찝하고 허탈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끔찍한 장면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 소녀가 나쁜 놈들에게 칼로 입을 찢기는 부분이었다.
물론 어릴 때도 그런 잔인한 영화의 장면이 무섭고 잊혀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고 보니, 이제는 그런 슬픈 일들이 더 이상 허구의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다 지어낸 이야기야,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렇게 쉽게 위안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씁쓸하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한다는 건 스스로 용납하기 힘든 일인 것을 알기에, 주로 올레 TV에서 제공하는 무료 콘텐츠에서 열심히 영화를 찾는다. 기본적인 영화 정보와 사람들의 평이 어떤지 대충 훑어보면서 영화를 골랐다. 아무래도 무료다 보니, 최신 영화나 뭔가 핫한 영화는 별로 없었다.
이후 웨이브, 넷플릭스 서비스에 가입했다. 한번 영화를 보면, 취향에 맞는 추천영화가 줄줄이 뜨니 신세계에 온 듯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물론 유료인 건 엄마에겐 비밀이다.
그렇게 지난 1년 6개월 동안 엄마와 함께 본 영화가 180편이 넘는다.
한 달에 적어도 10편은 본 셈이다. 많이 볼 때는 하루에 2~3편도 보고, 바쁘고 여유가 없을 때는 몇 달씩 안 보기도 했다. 지난 여름만 해도 2시간씩 같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는 게 고역일만큼 너무 더웠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두어 달 영화 보는 것을 쉬고는 있지만, 이제는 조금씩 밤바람이 시원해지는 게 느껴지니 곧 다시 시작이다. 코로나에 더위까지 이 힘든 여름을 버텨낸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랄까.
그날을 기다리며 설레는 요즘이다.
<시티 오브 조이> 영화는 뒤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