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Goodbye Again, 1961)
이성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순간 당황할 것 같다.
'이 사람 뭐지?'
평소 호감이 없던 사람이라면 '있어 보이고 싶어서 허세 부리나?' 오히려 아니꼽게 보일 것도 같고, 정말 멋진 사람이라면...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려나?
그저 '클래식을 좋아하나 보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엄마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신다.
나를 가졌을 때는 더더욱 태교를 위해서 클래식 음악만 들으셨단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낳은 자식은 클래식은 듣지도 않는다는 얘길 가끔 하신다. 그때의 엄마 표정은 진짜 억울해 보인다. 하지만 그 뾰로통한 표정에 난 또 웃음이 난다.
1년 전쯤의 일이다. 엄마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냐고 나한테 물으셨다. 클래식 전문 라디오 채널에서 브람스 음악을 들려줬는데, DJ가 이 영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같은 제목의 드라마는 알아도 영화는 몰랐던 나였다.
프랑스 영화이고 나중에 미국에서 <Goodbye again>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된 것 같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프랑스와 미국의 합작 영화로, 프랑스에서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미국에서는 <굿바이 어게인>으로 개봉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수>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상영되었다. 엄마는 예전에 <이수>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던 건 기억이 난다면서, 보진 못했지만 다른 영화로 생각하셨다고 했다.
가끔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구하지 못한 때도 있었는데, 다행히 올레 TV의 영화 목록에서 <이수>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래전 영화라 그런지 1400원 정도의 비교적 적은 금액이었다. 주로 무료 영화만 보던 우리에게 결제를 하고 영화를 본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마침 2천 원 쿠폰이 있어 결과적으로는 돈을 들이고 보진 않았던 것 같지만.
<이수>는 실내장식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를 둘러싼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녀의 오래된 연인 로제(이브 몽땅), 그리고 그녀에게 인테리어를 의뢰한 고객의 아들인 청년 시몽(안소니 퍼킨스). 로제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남자이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만난 24살의 청년 시몽은 폴라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로 폴라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현실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뭔가 오그라들 것 같지만 영화 속에서는 역시 낭만적이다. 폴라는 열 살이 넘게 차이나는 청년의 구애에 혼란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순수함에 끌린다. 그녀의 연인 로제는 부유한 사업가로 젊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것이 일상이다. 폴라도 이러한 낌새를 느끼고 있지만,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어서인지 그녀의 자존심 때문인지 문제 삼지 않는다. 폴라는 잠시 로제를 떠나 시몽과 함께 살았지만, 결국 로제에게 돌아간다. 떠나는 시몽을 향해 "나는 너무 늙었어."라고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버림받은 것처럼 안타깝고 마음이 짠하다.
시몽은 젊고 열정적이지만 계속 함께 하기에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로제도 젊은 여인들과의 관계에서는 가질 수 없는 안정감을 찾아 폴라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바람둥이가 어디 한순간에 변하겠는가. 폴라와 함께 하면서도 로제는 다시 다른 여자들을 찾는다.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의 영화는 <카사블랑카(1942)>,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수>에서 40대 중반에 들어선 그녀의 연기는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내 나이 역시 비슷한 중년이어서 공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안소니 퍼킨스(Anthony Perkins; 1932~1992)는 처음 그 이름을 봤을 때 <양들의 침묵(1991)>, <한니발(2001)>의 살인마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 1937~)와 헷갈렸다. 홉킨스의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을 때의 모습만 익숙해서 '젊었을 땐 저렇게까지 달랐다고? 설마...' 했지만, 역시나 다른 배우였다.
게다가 퍼킨스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1960)>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에서의 젊고 철없는 이미지와는 전혀 연결되지 않지만.
이브 몽땅(1921~1991)은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그의 영화나 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이 영화에 나온다는 걸 알았을 때, 엄청난 미남 배우를 상상하며 기대했다. 하지만 그냥 아저씨로 보여 조금 실망했다. 실제로는 영화 속 상대역인 잉그리드 버그만보다도 6살이 어렸는데도 말이다. 역할 자체가 그리 호감이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다. 또 모른다, 내가 더 나이가 들면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마농의 샘(1986)>에도 출연했다. 어릴 때 본 영화라서 내용은 모르겠고, 그저 샤랄라한 금발의 마농 모습만 기억이 난다.
한때 이브 몽땅은 샹송 가수의 대명사이자 영화 <라비앙 로즈(2007)>의 그녀,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각각의 영화에서 알게 된 배우 혹은 그 실제 모델들끼리 이런저런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또 다른 재미이다.
이브 몽땅이 샹송 가수라는 것만 알 뿐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고 하자, 엄마는 <고엽>이 유명하다고 하셨다. 얼른 스마트폰에서 찾아 바로 엄마와 함께 들어보았다. 그가 영화 <밤의 문(1946)>에서 불렀던 것으로, '샹송'하면 떠오를 만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고엽(Les Feuilles Mortes)은 '마른 잎, 낙엽'이라는 뜻인데, 사랑이 지나간 후 남은 추억과 회한을 낙엽에 비유했다. 노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샹송을 장난 삼아 흉내 낼 때 뭔가 중얼중얼하는 느낌과 딱 들어맞는다. 노래의 중간에 이르러서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 제목처럼 쓸쓸한 느낌의 샹송.
이 영화는 프랑스의 인기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1935~2004)이 24살의 어린 나이에 집필한 동명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원작으로 한다.
그녀는 이보다 더 전인 19살에 이미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데뷔작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으로 1954년 비평가 상을 수상할 만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이 역시 1958년에 오토 프레밍거(1906~1986)가 감독, 데보라 카(1921~2007), 진 세버그(1938~1979)가 출연하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섬세한 심리묘사와 담담한 필치를 바탕으로 어린 나이부터 연달아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며, 자유로운 감성으로 청춘을 대변했다.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로 불린 그녀의 인생은, 심각한 교통사고로 이어진 과속운전, 두 번의 결혼과 이혼, 폭음과 약물 과용, 도박 등으로 파란만장했다. 50대에는 마약복용 혐의, 60대에는 탈세범으로 기소되었다. "타인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한편, 열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수'는 '이별하는 슬픔, 이별의 슬픔'이라는 뜻이다.
원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보다는 <굿바이 어게인>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결말은 폴라가 로제에게 돌아가고 시몽과 이별하는 것이지만, 실은 로제와도 이미 마음으로 이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폴라는 그의 곁에 남았지만 늘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까.
삼각관계는 연애소설과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멋진 남자 두 명이 한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며 헌신적인 모습은 여자들의 로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폴라는 전혀 부럽지 않다. 그녀의 마음을 갉아먹고 외롭게 하는 로제, 그리고 세상살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고 곁에 있기에 부담스러운 에너지를 가진 시몽. 그 누구를 만나건, 사람이기에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지만, 나라면 둘 다 사양하고 싶다. 물론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테고, 내가 로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일도 없겠지만.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
사랑은 진부하고 흔한 말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닿기 힘들고 이루기 어려운 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