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오의 연정(1957)
그날도 역시 무료 영화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포스터가 흑백이거나 사진이 아닌 그림인, 옛날 분위기가 나는 영화들은 그냥 건너뛴다. 리모컨 버튼을 한번 더 눌러 굳이 내용을 읽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엄마는 영화를 고르고 play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설거지를 한다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작하면 불러."
이미 TV 앞 소파에 앉아있을 때에도 엄마는 영화 목록을 잘 살펴보지 않는다. 빠르게 휙휙 넘어가는 화면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그러던 엄마가, 갑자기 말했다.
"그거 보자."
"어떤 거?"
"하오의 연정. 오드리 헵번 나오는 영화 같은데?"
"아, 그럴까?"
오늘도 또 하나 새로운 엄마의 취향을 알았다.
엄마가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상상도 못 했다.
엄마는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고, 유튜브 기능도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루는 엄마가 유튜브의 어떤 조작법을 얘기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 거다. 당연히 내가 모르는 기능이 있을 수 있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엄마가 잘 모르고 하는 얘길 거라고 단정 지었다.
엄마를 누구보다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인격체로 존경하면서도,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무시할 때가 있다. 단지 엄마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그 밑바탕에는 평생 자식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한 집에만 있는 주부라는 게 깔려있기도 하다. 유난히 엄마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있다. 존경하지만 무시하고, 사랑하지만 원망스럽고, 짠하다가 짜증 나고. 머릿속으로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없고, 내 평생 가장 큰 행운은 엄마가 내 엄마인 거고,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품어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고. 엄마를 떠올리면 항상 마음이 포근해지면서도. 정말 못됬다, 아니 못났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엄마는 한번 더 말씀하셨다.
곰곰이 되돌아보니, 옛날 영화를 안 좋아한 건 지극히 내 취향이었다. 그러면서 엄마의 영화 취향도 선남선녀가 나오는 요즘 로맨틱 코미디, 따뜻하고 감동적인 드라마 정도일 거라고 제한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기에 엄마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안 했었다. 엄마 취향의 영화를 고른답시고 막상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하오의 연정>은 오드리 헵번(1929~1993)과 게리 쿠퍼(1901~1961)의 로맨스, 코미디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전설인 빌리 와일더(1906~2002)가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 감독했다.
그는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영화 <사브리나(1954)>와 마릴린 먼로 주연의 <뜨거운 것이 좋아(1959)>, <7년 만의 외출(1955)> 등의 각본, 제작, 감독을 했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21번 올랐고 그중 ' 평생 공로상'을 포함하여 7번을 수상했다. <이중 배상(1944)>, <선셋 대로(1950)>,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가 특히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는데, 아쉽게도 전혀 모르는 영화들이다.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은 왠지 어렵고 재미없을 것 같은 편견이 있어, 굳이 앞으로 찾아서 볼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인생은 장담할 수 없다. 고전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던 내가 요즘은 이렇게 많은 고전영화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 영화, 옛날 배우에 관심 없더라도 '오드리 헵번'이란 배우의 이름 한번 못 들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처음 그녀의 영화를 본 건 중학생 때였다. 그때 한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가 TV에서 자주 방영됐고, 아이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핫했다. 학교나 학원 앞에서 영화 속 비비안 리(1913~1967)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파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덩달아 유명해진 영화가 바로 <로마의 휴일(1953)>이다.
"비비안 리와 쌍두마차를 이룰 만큼 아름다운 배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드리 헵번이더라."
그렇게 그녀들의 인기는 세월을 거슬러 1990년대 대한민국 소녀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마치 이 두 영화를 안 보면 유행에 뒤떨어진 것처럼 우리들은 앞다퉈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로마의 휴일을 봤다.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옛날 영화를 다 알아?" 신기해하셨고, 난 또 으쓱하며 "오드리 헵번이 유명하더라고." 아는 척을 했다.
이후로도 고전영화의 배우에 관해 조금씩 알아갈 때마다, 영화에 대해 뭔가 좀 아는 지성인이 된 마냥 우쭐한 마음이 있었다. 지금 시대에 유명한 배우가 있듯이 그들 역시 그저 좀 더 이전 시대의 배우였을 텐데, 뭔가 기분이 좀 달랐다.
그 바탕에는 "그 배우도 알아? 옛날 배우인데. 우리 딸은 모르는 게 없네." 하는 엄마의 칭찬이 있었다.
<하오의 연정>에서 오드리 헵번이 짝사랑하는 중년의 멋쟁이 부호이자 세계적인 바람둥이 역할은 게리 쿠퍼가 맡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얼굴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하이 눈(1952)>을 비롯한 서부영화의 주인공을 맡았으며, 미남배우로의 명성은 익히 들어봤어도 말이다.
그나마 출연작 중 아는 영화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4)>였고, 그 유명한 키스신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의 상대역이었다. 어릴 때 그 장면을 보고 '그러게, 키스할 때 코는 어떻게 하지?' 궁금했으나, 그건 잉그리드 버그만의 코 정도는 되어야 걱정할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하오의 연정>에서 연기할 당시 게리 쿠퍼는 57세로 실제 오드리 헵번과는 28살 차이가 났다. 한창 그가 멋졌던 리즈 시절은 조금 지난 나이여서인지, 물론 역할 자체도 중년 남성이긴 했지만, 요정 같은 아리안느(오드리 헵번)가 왜 이런 남자에게 끌리는지 감정몰입은 잘 되지 않았다.
원제는 <Love in the afternoon>으로 '하오'는 오후, 정오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아리안느는 첼로를 연주하는 학생인데, 사립 탐정인 아버지가 조사하는 고객들의 정보가 담긴 내용을 훔쳐보는 것을 즐긴다. 플래니건(게리 쿠퍼) 역시 그렇게 알게 된 희대의 바람둥이로, 살해 위협에서 그를 구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리안느는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도 경험이 많은 바람둥이처럼 본모습을 숨기며 그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옛날 영화 같지 않다, 요즘 영화의 소재로도 손색없겠다'는 것이다.
로맨스 영화는 다 거기에서 거기 같은 비슷한 흐름을 가진 것 같아도, 여주인공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오히려 찝찝한 느낌이 들기 쉽다. 신데렐라, 캔디 스토리는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활용되곤 하지만, 여주인공의 캐릭터에 따라 호감과 비호감이 한 끗 차이가 될 수 있다. 로맨스는 상대적으로 여성 관객이 선호하는 장르이기에 남자 주인공의 외모와 성격이 다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오드리 헵번은 깜찍한 아리안느 역으로 통통 튀는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플레이걸처럼 자신을 숨기나 싶지만, 그러한 그녀의 밀당이야말로 플레이보이를 사로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면에서 아리안느는 또 다른 신데렐라, 캔디 같지만 뻔하지 않고 입체적이다.
옛날 영화의 여주인공은 청순가련, 순애보에만 목숨 거는 단편적인 인물이라는 생각도 결국 편견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고전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다 그 이유가 있다고,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옛것은 모두 고리타분할 거라는 섣부른 판단도 동시에 가졌다.
특히 영화는 날이 갈수록 촬영기술과 특수효과 등이 발전하고 있기에, 고전영화를 보면 음악도 지나치게 극적이고 배경도 어색하고 장면이 넘어가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나 배우들의 연기, 캐릭터의 매력은 어쩌면 볼거리에 치중한 요즘 영화보다 나을 수 있는데 싸잡아서 색안경을 끼고 봤나 보다.
어릴 때는 왜 나이 들면 다들 트로트를 좋아하는지, 내가 보기엔 느끼하기 짝이 없는 남진 나훈아를 오빠라고 하며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저씨인 HOT와 젝스키스가 나에게는 귀여운 아이돌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을.
엄마가 옛날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영화를 보던 당시 엄마의 젊은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던 그 시절을 함께한 추억의 배우들이 반가운 것도 한몫할 테다. 그런 걸 배제하더라도 정신없는 화면 전환과 자극적인 요즘 영화보다 차분한 느낌의 옛 영화가 취향일 수도 있다.
촌스러운 화면 구성에 밋밋하다고만 생각했던 고전영화가 좋아지는 나도, 어쩌면 점점 옛날 사람이 되어가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