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혼(캐리 carrie, 1952)
영화 <캐리>라면,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공포물이 먼저 떠오른다.
내성적인 소녀 캐리가 친구들에게 심하게 따돌림을 받은 후, 초능력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1976년 브라이언 드 팔마(1940~) 감독이 연출했을 때도 크게 반향을 일으키며 성공했고, 2013년에는 클로이 모레츠(1997~)가 주인공 역할을 맡아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피를 뒤집어쓴 캐리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캐리가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유부남(조지 허스트우드)이 아름다운 시골 처녀(캐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거리의 부랑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1952년작 고전영화 <캐리>는 제니퍼 존스(1919~2002)와 로렌스 올리비에(1907~1989)가 주연, 윌리엄 와일러(1902~1981)가 감독을 맡았다. 배우들 뿐 아니라 감독까지도 유명한 그야말로 전설들이 모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캐리는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난한 아가씨이다.
교양 있고 부유한 조지는 캐리와 사랑을 키워가지만, 그가 유부남인 걸 알게 된 캐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조지는 캐리를 포기할 수 없었고, 일하던 곳에서 돈까지 훔쳐 함께 도망간다.
그렇게 사랑의 도피를 벌이지만, 그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조지는 현실의 궁핍함을 견디기 어려웠고, 피폐해진 그는 캐리가 임신과 유산을 겪을 때도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조지가 아들의 결혼식을 참석하러 잠시 떠났을 때, 캐리는 눈물을 훔치며 짐을 싸고 그와의 이별을 단행한다.
이후 캐리는 배우로서 성공한 반면, 조지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노숙자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조지는 캐리를 찾아오고 캐리는 그런 조지를 따뜻하게 맞아주지만, 그는 결국 그녀의 곁에서 다시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
이 남자가 사랑에 진심이었던 것은 안다. 캐리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기에, 전 재산을 부인에게 양도하고 이혼했을 것이다. 사랑을 선택한 결과 아들의 결혼식에도 떳떳이 나서지 못하는 아버지가 되었으니,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셈이다.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그가 가족을 버린 것이 먼저지만.
그렇지만 일도 돈도 충분했던 시절의 여유로운 그가 아닌, 냉혹한 현실 속에서의 그는 캐리에게 좋은 남자이기 힘들었다. 캐리 역시 힘겨워하는 그를 보며, 다시 가족을 찾아가 편안한 삶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떠난다.
엄마는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엄청 울었다고 한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가 바람피워서 저렇게 된 건데, 뭐가 불쌍해."
"그래도..."
"아니, 처음부터 결혼한 것도 숨기고 사귀질 않나.
오래 같이 살다 보면 다 데면데면하게 사는 거지, 뭐 부인이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혼을 할 거면 깨끗하게 하고 가던가.
남의 돈을 훔쳐서 도망을 가질 않나.
책임감 없고, 생활력 없고, 자존심만 강해설랑.
여자(캐리)가 나쁜 맘먹고 배신해서 도망간 것도 아니고.
나중에 세상 찌질해져서 나타나도 다시 캐리는 받아주려고 하고.
저 남자가 뭐가, 어디가 불쌍해?
엄마는 참..."
나는 흥분해서, 마치 엄마를 힐난하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건조한 나에 비해 엄마가 감수성이 풍부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불륜남에게까지 연민을 느낄 줄이야. 못 말려...
영화를 함께 보다 보면 나는 덤덤하다 못해 지루해하고 있을 때, 엄마 혼자 슬며시 눈물을 훔칠 때가 종종 있다. 지금도 그럴진대, 엄마가 젊었을 때는 훨씬 더 했단다. 무슨 영화든 영화만 보면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그땐 뭐가 그렇게 다 슬펐는지" 라며 엄마는 부끄러워했지만, 순수한 엄마의 옛 모습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른다.
이 영화는 미국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가 테오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소설 <Sister Carrie>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으로, 가난한 여인이 성공과 출세를 이뤄가는 과정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출판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영화 초반을 살펴보면, 캐리는 언니가 사는 도시인 시카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찰스를 만난다.
캐리는 공장에 취직을 하지만 손이 다쳐 해고되고, 그녀가 돈을 벌지 못하자 형부의 구박은 날로 심해진다.
이를 피해 캐리는 찰스와 함께 살게 되는데, 조지를 만나게 된 것도 찰스와 함께 간 식당에서이다.
한 남자와 동거를 하면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캐리에 대해 영화에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가는 듯했다. 조지와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핵심 내용이고, 찰스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자 조지를 만나게 해 준 계기를 마련해준 조연일 뿐이었다.
반면 책에서는 캐리가 이후에도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는 과정을 거치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고,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반도덕적이라고 비판받은 것이다.
드라이저는 몽고메리 클리프트(1920~1966),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2011)가 주연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1951)>의 원작 <미국의 비극>을 쓰기도 했다. 이 소설은 한 사형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아메리칸 드림'의 반대선상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간략한 내용은 '가난한 주인공 조지가 부잣집 딸인 안젤라를 만나기 위해 임신한 애인을 죽이고 결국 자신은 살인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원제은 <캐리>지만, 시골 처녀 캐리의 사랑과 성공담보다는 조지의 몰락과 비극이 더 마음에 남는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당시 <황혼>이라고 이름 지은 것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성공한 캐리는 그를 보듬으며 다시 함께 하자고 하지만, 그는 단 몇 센트의 동전만을 받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사랑을 하라고, 사랑은 멋진 것이라고 말한다.
쯧, 그럴만한 형편도 안되면서 끝까지 허세 부리기는.
한편으론 그녀를 진심으로 아꼈기에 곁에 남지 않고 떠난 것이고, 마냥 미워만 하기에는 이 남자가 짠하고,
또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가 그를 안타까워했던 것도 얼핏 이해가 갈랑말랑 하기도 하고.
불현듯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에서 불륜을 저지는 남편(이태오 역, 박해준)이 아내(지선우 역, 김희애)에게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전 부인과는 안정되고 풍요로웠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가던 남자가 인생을 걸고 한 선택.
삶의 모든 것과 바꿀 정도로 불타오르던 사랑에 자신을 내던졌던 조지는, 노숙자가 된 이후 그때의 그 결정을 후회했을까?
사춘기 때는 '한번 사는 인생, 파란만장하게 드라마틱하게 살아야지.' 라며 영화 같은 인생을 꿈꿨다.
그렇지만 이제는 무탈하게, 걱정 없이, 조금 심심한 듯한 인생이 오히려 좋다.
세월에 깎이고 무뎌져서인지, 오히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지쳐 이젠 조그마한 자극에도 쓰러질 것 같아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러게, 그냥 부인과 정 없어도 무난하게 자식 보면서 살지.'
불타는 사랑에 몸을 내던진, 찌질한 불륜남 조지에게 연민이 들면서도, 그의 열정과 에너지는 살짝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