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 Annie(1982)
거의 40년 전에 본 영화의 OST인데, 아직도 흥얼거리게 되는 익숙한 선율이다.
물론 가사는 Tomorrow 외에 모르지만...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애니(1982)>를 봤다.
영화관에 가서 본 제일 첫 영화라 그런지, 반가운 마음에 채널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시청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시기는 대학생,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이다.
최신 개봉 영화는 거의 다 봤고, 심지어 같은 영화를 두세 번씩 본 적도 있었다.
그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영화는 뭘까?
TV에서 본 영화들은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SBS 방송국도 생기기 전이니 영화를 볼 수 있는 채널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방영하는 시간대가 주로 밤이었고 어린이는 그 시간에 자야 했으니 기억이 희미한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전차 경주 장면이 인상 깊은 <벤허(1959)>를 상당히 여러 번 방송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1942~)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았다. 어린 마음에 저 배우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당시에 나오는 유명한 영화에서 주인공을 도맡아 해서 이상했다.
선명히 기억하는 첫 영화,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한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 최초의 영화 <애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6년에 개봉했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이모와 사촌동생들까지 6명이 쪼르르 일렬로 앉아 함께 봤었다.
<애니>는 첫 영화라는 데에 의미가 있지만, 유독 잊혀지지 않는 내 인생의 한 장면도 함께 있다.
주인공 소녀 애니가 악당들을 피해 높은 탑에 매달렸을 때였다. 혹시라도 애니가 떨어질까 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움찔움찔거리며 나도 모르게 "어머"라고 외쳤다. 그때 옆에 있던 이모가 돌아보고 "얘 좀 봐, 몰입했나 봐." 하며 웃었다.
어린 꼬마가 영화를 꽤 심각하게 보는 모습이 이모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나 보다. 하지만 내 감정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는 것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마치 울고 있을 때 아이들이 놀려서 창피한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소리 내지 말고 포커페이스로 무덤덤하게 영화를 봐야지 다짐했었다. 강하고 씩씩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강한 것일 수 있는데 말이다.
<애니>는 미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아 소녀 애니가 부자인 워벅스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워벅스는 밝고 명랑한 애니에게 정이 들고 그녀의 부모를 찾아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돈을 노린 가짜 부모들이 나타나고 애니는 곤경에 빠진다.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엔딩. 애니는 워벅스의 양녀가 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인다.
<애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때는 이걸 알고 영화를 봤을까? 물론 영화 앞부분에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짚어주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긴 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에 대한 별다른 인식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영화를 보는 1986년 즈음에 영화가 만들어졌을 테고, 그 영화의 배경 역시 1980년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더 어릴 때는 TV 속에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상상했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꼭 대단한 지식이 아니더라도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어릴 때는 영화를 단순하게 보았다. 영화의 줄거리, 캐릭터에 집중해서 말이다.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많은 소녀, 고아원 원장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씩씩한 아이.
영화 속 주인공은 이런 모습일 때가 많다. 말괄량이 삐삐나 빨간머리 앤도 그렇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의 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얌전하고 소심한 아이였다. 그런 내 눈에는 이런 영화나 소설 속 아이들은 그저 허구에서나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에이, 실제로 저런 애가 어딨어. 어른들한테 얼마나 혼이 나려고.'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늘 그들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 부러웠다.
언젠가부터는 영화 자체가 아닌 실제 배우와 관련 정보에 관심이 생겼다.
"이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도 나왔지.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인생을 살았다더라. 이 영화의 원작으로는 소설이 있고, 그 소설가는 또 어떻더라. 영화 속 음악은 무엇이고, 이 작곡가는 또 누구이더라." 하고 말이다.
<애니>도 마찬가지다. 새로이 이 영화를 검색해보니, 흥미로운 사실들을 속속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지만, 요즘은 인터넷만 조금 검색해보면 영화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전에는 직접 영화관에서 가서 영화를 본다한들, 영화관에 꽂혀있는 한 장의 프린트물에 적힌 정보가 고작이었다. 더 알고 싶으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잡지와 책을 찾아봐야 했으려나? 인터넷이 없던 세상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것들을 지금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좋다.
<애니>의 시작은 1920년대 만화라고 한다.
이후 애니메이션과 TV 드라마, 뮤지컬로 만들어졌고 2014년도에는 영화가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1982년 제작되었던 영화의 감독은 존 휴스턴(1906~1987)으로, 그의 아버지인 월터 휴스턴부터 딸 안젤리카 휴스턴, 아들 대니 휴스턴, 손자 잭 휴스턴까지 배우로 활약했다. 4대에 걸쳐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 등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해 그 실력을 인정받은 영화계의 명가이다.
반면 애니 역의 아이린 퀸(1982~)은 이 영화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들 나름의 선정 기준이 있었겠지만, 기껏해야 11살짜리 꼬마의 연기가 얼마나 못마땅했기에 굳이 이런 상을 줘야 했나 의문이 든다.
<애니>는 아무래도 뮤지컬 영화이다 보니 여러 노래가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Tomorrow>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 만큼 중독성 있는 노래이다.
가사를 찾아서 살펴보니, 그 내용도 참 좋다.
원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라 하지만, 내겐 유난히 몸도 마음도 힘든 요즘이다.
최근에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답답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한 몫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노래처럼, 힘들고 지친 오늘에 머물지 않고 내일을 노래하며 희망을 찾고 싶다.
빨간 머리 주근깨를 가진 씩씩한 소녀, 애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