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다시 사랑을 시작한 것 축하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박 사건!‘
그 사람을 믿고 다가가고 교제를 시작한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나르시시트가 넘치는 세상이잖아요. 내가, 아니 나만 인생의 중심이 되고 타자와 타자성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그걸 감히 품기도 망설여지는 세상이잖아요.
그래도 자신의 그림자로만 세상을 살면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을 텐데 연약한 영혼끼리 서로 고백하고 경청하고 위로하고 돕기로 선택한 것, 너무 보기 좋아요. 또 상처를 받겠죠. 헤어질 수도 있겠죠. 그래도 사랑을 하기로 시작한 건 멋진 실존의 선택이라고 봐요.
사랑하지도 않고 함께 일하지도 않고 우린 과연 나르시시즘의 주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평일에 붐비는 강의실 복도에서 이를 닦으며 유유히 화장실로 걸어가는 학생이나 직원이 있어요. 저런 사람의 심리상태가 참 궁금했죠. 어제는 꽤 넓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기구를 지켜보며 칫솔을 입에 물고 지나가는 정체불명의 회원, 혹은 직원을 바라보면서 나름 이렇게 추론했어요.
’저건 그냥 즉흥적인 행위가 아니다.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보여주는 의도된 행동이다.‘
한가롭게 인터뷰라도 하면서 그들을 붙잡고 연구할 수는 없지만 내 짐작이 그럴싸하지 않나요? 이를 닦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칫솔질을 해대며 복도를 걸어 다닐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부담스러운 타자의 시선은 배제하겠죠. 혼자서 자유롭고 해방된 느낌을 선택하고 저렇게 걸어 다니며 이를 닦는 겁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가 만든 상품적인 자아와도 관련성이 클 것 같아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니까요. 전시하고 구경하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일종의 강박적 자아이기도 해요,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같은 틀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애의 상징(적 기호)를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 닦는 자신의 이미지를 선택하고 몰두하며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전념하며 살고 있어요.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겠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건 자아를 혐오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가만 보면 예쁘게 이를 닦으며 걸어가다가도 갑자기 인상을 확 구기며 이를 북북북 문질러요. 잇몸을 문지르는 몸의 쾌락이라도 함께 느끼면서 말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보다 본인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죠. 공감능력은 부족하면서 과도한 자기애 때문인지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작 본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늘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죠.
사이코패스, 사디즘 등의 심리적 상태와 비교했을 때 나르시시즘는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나르시시즘 자아도 권력의 지향성이 강하거나 내면이나 주변 상황을 과장하는데 그게 위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가요. 마치 누구나 그러한 속성이 있다는 식으로 미디어는 그걸 긍정적 성격처럼 재현하기도 합니다.
나도 그렇고 당시도 나르시시즘 자아의 조각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다고 누구나 왕자병, 공주병의 내면 상태로 살진 않죠. 나르시시즘 자아를 직면하지 못하고 자신을 그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과도한 피드백을 선택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르시시트는 결국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늘 주인공이 되는 인간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긍정적 태도로 인간관계를 곧잘 시작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물론 감정 흡혈귀로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실존을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순 있겠죠. 그렇지만 나르시시트의 허영심은 쉽게 드러나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은 반감을 갖게 되죠. 당신이 좋아하는 그 사람은 자기애가 과도하게 넘치진 않겠죠?
함께 일하는 리더가 자기애 과잉이라도 참 곤란하죠. 데이트는 가끔 한다지만 일은 매일 하는 것이니까요. 나르시시트 사장 혹은 팀장은 자신이 가르치거나 관리하는 다수의 잘난 점을 인정하지 않아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기중심적 관계성을 유지한다고 할까요?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줍니다.
나르시시즘이 한편으로 보면 긍정성과 창의성으로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견제가 없고 관계성에 관한 성찰이 없는 사람은 결국 파괴적이고 해악적인 인물로 남죠. 그런 점에서 보면 나르시시트와 교제를 피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래도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단 둘이서만 자꾸 만나는 건 비추입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도 사랑이란 핑계로 나르시스트의 포로가 살아갈 수 있어요.
심리학에서는 나르시시즘의 근원이 자기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회피하고 자신의 페로소나를 드러내는 것이 심각해 보입니다. 분명 성격장애입니다. 근사하게 보이는 사회적 풍조를 자기식으로 내면화시키죠. 그게 평소 모습과 다르기도 해서 나르시시트의 자기애는 자기부정이나 자기혐오의 감정과 공존합니다.
그런 이중적인 자아가 긴 세월 유지되면 모순적인 자의식에 대해 질문도 못해요. 그렇게 되면 도덕심, 신뢰, 공감, 양심, 비판 등은 피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죠. 오로지 자신의 페르소나를 강화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집착합니다. 연애 상대로는 최악의 캐릭터입니다.
정작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사람, 심리적인 일관성이 없는 사람, 얘기 나누는 것을 좋다고 하면서도 토론이나 상호비판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합의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상황과 내면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결국 거짓말쟁이나 욕심쟁이가 되)는 사람.
이런 나르시시트가 많으면 자유가 상호권리가 존중되는 열린 사회도 없어요. 나르시시트가 넘치는 사회는 위계화된 권위주의 질서가 만들어집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양한 개인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도 못하고, 독선과 권위의식만 쌓입니다. 인격적인 사랑도 사라집니다.
공적 공간의 복도에서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이를 닦는 수준이 아니라 중증 나르시시트가 정치인, 사업가, 공무원으로 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자칫하면 아주 심각한 범법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어요. 나르시시트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업에, 지역사회에, 국가에 불편과 고통을 줄 수 있어요.
권력자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간신배는 내면이 연약한 나르시시스트 리더 옆에 붙어있는 편입니다. 달콤한 말로 나르시시트를 현혹해온 간신배가 자신의 이익만 채운다면 그나마 다행이죠. 현실을 다면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분별하지 못하는 나르시시트 리더는 결국 불법과 탈법의 유혹에 넘어가요. 자신의 나르시시스트적 내면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떤 거절도 하지 못하는 단계라면 더욱 그렇죠. 마치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가 극단적 상황에서 마약과 알콜을 위해 어떤 거절도 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붙들고 있는 자아란 것이 참 모순적이고 연약합니다. 사랑의 감정 역시 모순적이면서도 참 약해 빠졌어요. 알랑 드 보통이 그랬던가요. ’사랑은 침대 시트 같다.‘ 네 귀퉁이가 절대 반듯하게 펴지지 않으니까요. 한쪽이 마음대로 구성한 다른 편의 이상화된 모습은 서로를 결국 지치게 합니다.
당신도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었죠. 그러나 나르시시트가 되지 않고 타자성을 수용하는 사랑꾼이 다시 되었어요. 우선 사랑의 이름으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실망과 분노를 반복하지 마세요. 차라리 완벽에 대한 집착, 자신에 대한 한없은 애정을 포기하면 어떨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은 못된 인간만도 아니고 초월적 신도 아니고, 그저 우리만큼 연약하고 모순적인 자아로 살아갈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