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와 김장훈; 사랑과 미움

by 신동일

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연애를 하면 상대를 향한 감정이 참 모순적이예요. 좋지만 밉고, 싫지만 보고 싶죠. 그건 도대체 왜 그럴까요?

예전에 싸이(PSY)가 ‘강남 스타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에 친형처럼 따르던 가수 김장훈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소식이 있었어요. 사건의 진위를 두고 양측 간의 공방이 계속될 때, 김장훈은 싸이의 공연장을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둘은 함께 소주잔을 들어 러브 샷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랬어요. “둘이 서로 밉다고 으르렁대더니 어느 모습이 진심이냐?” 내가 보기엔 ‘싫다’ 혹은 ‘좋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김장훈은 솔직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어요. 잘 나가는 동생을 찾아가서 미안하다며 러브샷 하긴 쉽지 않죠.


사랑과 미움은 사실 대립된 감정이 아니죠. 사랑한다고 마음먹으면 미움을 다 제거할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사람이 문을 꽝 닫고 나가면 밉죠. 그러나 사랑하니까 미운 것이죠. 미운 만큼 사랑도 깊어지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엮인 감정이랄까요.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건강하다'란 건 질병과 대립한 것이 아니라, 질병과 더불어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는 상태라고 했어요.


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나, 질병을 통해 건강이 드러나는 것이죠. 그러니 다 알 수도 없는 질병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하지 말고 보듬고 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표준적인 측정치로는 문제가 없어도 내가 아프면 아픈 것이죠. 겉으로는 아파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지키며 살 수도 있고요. 우리는 일관적이지 못한 내 안의 모순과 변화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 차이의 틈새와 타협하며 살아야 해요. 그래야만 극단의 대립과 표리부동의 허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여전히 불안과 위험의 시대를 살고 있어요. 거기서 사랑을 하는 것이죠. 살아가고 사랑하는 우리 자아는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가변적 상태일 수밖에 없어요. 정신상태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그건 자신의 역량 덕분만이 아니라, 그저 행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린 열심히 살았죠. 열심히 사랑하고 있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고통이 크게 느껴져요. 그런 이유 때문에 마땅한 혜안은 없지만 우선 자신의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정체성을 인정해야 해요. 그걸 직면할 용기를 가져야 해요. 연애의 주체로서도 그렇죠. 사랑하니까 밉다고, 미운 만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래도 서로가 보듬게 될 틈을 보여주는 셈이죠.


‘내가 좋아, 싫어?’‘어떡할지 지금 선택해.’ 이런 양자택일은 너무 살벌해요. 좋기도 하지만 부담도 되죠. 우리 누구든 찌르거나 찔리는 고슴도치의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봐요. 애매하죠. 그래도 사랑은 멋진 경험입니다. 인격을 존중하고 타자성에 호기심을 갖는 시간, 다시 편집되는 기억과 기대, 크게 함께 웃고 못난 자아를 보듬는 관계성, 그런 걸 어디서 경험할 수 있나요? 서로의 고통과 희망을 마음껏 누구와 얘기해볼 수 있나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공간에서는 대립적이고 경직된 언어가 선택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호기심 가득하고, 유머가 넘치고, 감각적인 소재로 넘치는 말과 글이 넘쳤으면 좋겠어요.


러브레터 써본 적 없죠? 시를 읽은 적은 있나요? 연애소설은 유치하다고 사보지도 않잖아요. 이참에 한번 편지도 써보고 남들 연애사도 한번 보세요.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삶이잖아요. 지적이고 논증적인 말과 글로만 버틸 수 없죠. 자신을 표현하고 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자유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배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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