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이 시 영
여기에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나는 저녁이면 돌아가 단란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여름이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날아가
몇 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비 내리면 가야산 해인사 뒤쪽 납작바위에 붙어앉아
밤새 사랑을 나누다가 새벽녘 솔바람 소리 속으로
나 아닌 내가 되어 허청허청 돌아올 수도 있어
여기에 이렇듯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 마. <시 전문>
인간은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전 한 코미디언은 방송에서와는 달리 집에선 과묵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직업적 특성상 끊임없이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노동(?)에 집중하려면 집에서만큼은 자연인으로서 깊은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한 호텔 셰프는 집에선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직업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사적인 영역에선 정반대일 수 있다는 걸 어린 시절엔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진짜 공부가 시작됐지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마음속 지혜라는 걸 알기까지 많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선 회식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이어졌어요. 무리 지어 상사들의 차를 타고 맛집 회식을 했지요. 입이 아주 짧은 제가 유명 갈빗집 회식 덕에 고기 맛을 알게 됐고, 피자도 그때 처음 맛보게 됐어요. 모든 회사가 다 그런 줄 알았지요. 나중에야 미혼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상사가 저와 자연스러운 대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기획 회식을 한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겨우 스물세 살 때 일이었어요. 가장 절친이었던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결국 서둘러 회사를 그만두게 됐지요. 그렇게 새 직장을 구하고 일하는 재미에 빠져들면서 연애는 먼 나라 일이 돼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일이 거의 전부인 시절을 보냈지요. 그러다 요가‧명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대학에 편입해 전공을 했어요. 요가 강사를 할 생각도 없었고 단지 재미있어서 공부를 시작한 건 제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 공부는 고전으로, 인문학으로 영역을 넓히게 됐고 거기서 인생 친구들을 만났어요. 놀이처럼 이것저것 배우면서 ‘일하는 인간’으로서의 나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인간’, ‘교유하는 인간’ 등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지요.
업무 특성상 회사에선 융통성 없고 곧이곧대로인 사람이었다면, 고전 수업 시간엔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엔 마음을 잘 여는 사람이었어요. 회사 동료들이 아는 나와 고전 수업 동기들이 아는 나, 마음공부 동지들이 아는 나는 동일인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을 만큼 달랐을 거예요. 내 안의 다양한 나와 만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타인들의 말과 행동이 마치 덧셈, 뺄셈처럼 쉽게 풀리는 신세계를 경험한 건 뜻밖의 선물이었어요.
내 안에 이렇듯 다양한 페르소나가 있는 것처럼 타인 또한 그렇다는 걸 알아차리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았어요. 그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상처 입었던 게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한 나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내 주제를 알아차리는’ 큰 산을 넘고는 혼자 우쭐하는 기분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이었어요. 의전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울며 전화한 후배가 있었어요. 마침 동생네 일이 있어 갔을 땐데 언제 집으로 오냐고 재촉하는 후배 때문에 먼 길을 서둘러 장까지 봐 집으로 오자마자 이른 저녁상을 차렸어요. 밥 한 그릇을 뚝딱하는 그 후배를 보는데 밥이 넘어가질 않았어요. 돌아보니 그 후배는 자기에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만 나를 찾았더군요.
뭐가 잘못됐지? 하며 하나하나 상황을 짚어보니 제 주변엔 그 후배처럼 아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항상 제가 뭔가를 해주는 걸 기본값으로 여기는 동료, 후배들은 제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마치 내게 맡겨놓은 걸 찾는 듯 굴었어요. 심지어 그 후배는 내 결혼 청첩장을 제일 먼저 받고도 축의금은커녕 축하 메시지도 없었고,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는 걸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지요. 그 후배를 시작으로 나를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전화 목록에서 하나둘 지웠어요. 관계 다이어트를 시작한 거지요. 그때부터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됐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어요.
요즘 들어선 어떤 새로운 수업에 가도 저와 결이 맞는 사람이 마치 자석처럼 저와 가까워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어요. 간절히 바라는 것에 응답받는 기분이 들면서 절로 감사 기도가 나오는 경험을 했지요. 타인의 도구로만 쓰이지 않으려면 그 첫걸음이 바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스스로 존중하는 일이겠지요. 내가 나를 존중해야 남도 나를 허투루 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시영 시인의 ‘나의 나’를 읽는 순간, 예전의 내 모습이 주르륵 펼쳐지더군요. ‘타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나’뿐만 아니라 ‘몇 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내 시간을 의미 있는 사람에게만 할애하는 나’일 수도 있는 다양한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중년의 나. 그런 나를 함박눈 내리는 오늘은 좀 더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