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그날의 결심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1)
지난가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여행 이야기들이 코로나 시국의 끝을 알려주는 듯했어요. 절친 모임에서 겨울 삿포로 여행을 앞둔 남편은 이른 가을부터 날 졸라대기 시작했지요. 친구랑 겨울 되기 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라는 거였어요. 그동안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던 여고 동창 미숙이 명퇴한 걸 알고 하는 말이었지요.
처음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요. 친정아버지는 집에서 입주요양사의 돌봄을 받고 있고, 엄마는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데 맏딸인 내게 여행을 가라고? 이해할 수 없는 남편, 남의 편 같았어요. 그동안 처가 일로 고생한 남편에게 집안 걱정은 접고 마음 편히 삿포로의 설경을 즐기다 오라고 했지요. 내 진심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나를 여행 보내려고 애를 썼어요. 남편의 평소 성정과는 달리 고집을 부리더군요.
그 무렵 미숙과 점심을 하게 됐어요. 일어 교사였던 미숙은 거의 매해 학생들 인솔해서 일본을 오갔어요. 그러다 코로나로 3년간 발이 묶였지요. 이제 명퇴하고 여유도 생긴 데다 코로나도 잠잠해져 일본 여행을 가려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이 일본 다녀오라고 성화라고 했더니 단박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얼결에 일본 여행이 결정됐고 미숙은 바로 비행 편을 알아보고 나와 여행 날짜까지 맞췄지요.
그러나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동안 잠자고 있던 불안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엄마에게 응급상황이 생기면? 구순 넘은 아버지도 안심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인데? 그러잖아도 시원찮은 내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지면? … 온갖 좋지 않은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을 오갔어요.
드디어 오사카로 떠나는 날, 먼저 공항에 도착해 나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미숙을 멀리서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날 만큼 반갑더군요.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는 오랜 친구. 마침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미숙은 ‘네 맘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날 맞아줬어요.
기다림 끝에 비행기는 구름 위로 날아올라 안정적인 궤도에 들었어요. 순간 답답한 곳에서 탈출하는 듯한 기분과 죄책감이 동시에 일어나더군요. 지난 3년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처음엔 친정엄마에게 일어난 일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좀 지나서는 분노가 치밀었어요.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불쑥불쑥 내 안에서 불길이 솟구쳤어요. 나를 다스리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내게로 다시 돌아왔지요.
이제 엄마와는 여행은커녕 의논도, 수다도 불가능해졌어요. 나를 가장 나답게 해 주던 일까지 내려놓아야 했지요. 나는 더 잃을 게 없는 것만 같았어요. 남편도, 아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거든요. 결국 이 진료과, 저 진료과를 순회하며 CT며 MRI를 찍다 정신을 차렸어요. 내가 겪는 일은 세상 사람들 모두 견뎌내던 일이었어요. 마치 나 혼자만 겪는 일인 듯 유난을 떨었다는 걸 깨달았지요. 오사카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엉겨 있던 감정의 가닥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한동안 들리지 않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더군요. 의사도 할 수 없는 일을 내 부모의 일이라는 이유로 막무가내 덤벼들던 내가 보였어요.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겪는 여정인데 태어나기만 하고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기를 바란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알겠더군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실소가 나왔어요. 내가 딛고 선 땅에서 발을 떼고 날아오른 순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더군요. 역할에 매몰돼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결심은 하늘을 날면서 일어났지요.
오늘의 결심
김 경 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시 전문>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라는 김경미 시인의 시구는 그대로 내 것이 됐습니다. 삶에서 만난 실망들은 썩은 치아를 빼듯 던져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을 깊이 심어봅니다. 사는 동안 적지 않게 무단횡단했는데도 내 몸은 여전히 성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적 있지만, 함부로 상처받진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발도 내딛기 전에 지레 겁먹는 짓은 할 만큼 했으니 더는 비겁해지지 않으려고요. 때로는 내 앞에 놓인 좁은 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기꺼이 한 발을 내디뎌보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