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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31. 2024

88. 집이 나를 말한다

— 나를 품어준 집 이야기

나를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살고 싶은 집’에 관한 글이 주제로 던져졌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집을 떠난 삶을 생각할 수 없다. 마침 내가 유일하게 보는 TV프로그램이 ‘건축탐구 집’이다. 그 프로 덕에 집에 대한 사람들의 로망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내가 본 집들은 제각각인 집주인들의 욕망이 이리저리 조합돼 똑같은 집은 한 쌍도 없었다. 그처럼 다양한 집이 작은 나라 안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소개된 많은 집 가운데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 프로를 즐겨봤던 이유는 사람들의 집에 대한 환상과 꿈이 꽤 흥미로워서였다. 다양한 집을 보면서 인간의 욕구가 결핍의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았다.     


난 안전에 대한 욕구가 매우 높다. 부산에서 2층 주택에 살 때 대낮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엄마가 옥상에 빨래 너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둑맞은 사실은 저녁에야 알았다. 도둑과 맞닥뜨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인지 세 자녀가 서울로 올라오고 부모님만 남은 집은 아늑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2006년 부모님이 서울 고층 아파트에 정착하셨을 때 만족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도둑의 기억 때문에 출입구가 항상 닫혀 있는 대단지 아파트는 안전에 대한 내 욕구를 충족한다. 엄마가 떠나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여전히 아파트 베란다에서 창밖 풍경을 즐긴다. 위로는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을, 아래로는 사람들이 천변 공원을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구순 넘은 아버지에게 집은 안전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풍경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좋아하지만 내게는 경외의 대상이다. 실내 흡연이 당연시되던 1990년대, 나는 시야가 뿌연 사무실에서 재채기와 콧물을 달고 일했다. 몇 년을 코감기인 줄 알고 엉뚱한 약으로 버티던 중 한 이비인후과에서 알레르기비염이란 병명을 처음 들었다. 알레르기체질로 바뀌고 나니 실내 금연이 시행된 후에도 비염은 깨끗이 낫지 않았다. 봄철 하얗게 날리는 꽃가루가 여전히 내겐 담배 연기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오히려 자동차 매연은 견딜 만하다. 창호가 좋은 아파트 고층은 꽃가루와 모기, 바퀴벌레로부터 안전하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여름철 매미들의 떼창도 고층에선 그리 소란스럽지 않게 들린다. 건너편 아파트의 잘 디자인된 조경수는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추위에 매우 취약한 나는 1년 중 6개월은 내복을 입어야 한다. 여름에도 카디건은 필수품이다. 이처럼 부실한 몸이 내가 살 집을 구체화해 줬다. 나이 들수록 안과나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은 물론 종합병원도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몸이 알려줬다. 엄마의 긴 와병과 임종은 내 심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름난 병원에서 머리부터 스캔하듯 훑었다. 병원이 멀었다면 치료는커녕 오가는 데 진을 다 뺐을 뻔했다.  

    

나는 이미 이상형에 ‘가까운’ 집에 살고 있다. 지하철역 가까운 대로변에 위치해 도서관, 평생학습관 다니기에 편리하다. 인생 친구라 할 사람들 모두 이 집에 사는 동안 만났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때론 서로 지혜를 빌리기도 한다. 그들 모두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큰일을 치를 때도 힘이 됐다. 지금 집은 기차역도 가까워 지방의 시댁과 부산을 오가기도 수월하다. 한 가지 결정적인 흠은 층간소음이다. 위층 부부는 개선할 의지가 없다. 그래서 다음에 살 집은 역세권 대단지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정해졌다.      


내가 살고 싶은 집에 관해 쓰다 보니 난 항상 머리가 아니라 몸이 원하는 곳을 찾아다녔다는 걸 알게 됐다. 차츰차츰 진화해 지금의 아파트에 정착했다. 회사 다닐 땐 10년 넘게 도보나 버스로 15분 이내 거리에 살았다. 가장 멀리 살았던 건 젊은 시절 지하철로 40분 거리의 아파트였다. 내 몸의 취약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출퇴근에 지치지 않는 거리의 지역으로만 옮겨 다녔다. 나이 들수록 집과 회사가 가까워졌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알아차렸다.      


서울에 정착한 이후 내가 살아온 집들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7평 원룸에서 시작해 지금의 아파트까지 7번 이사를 했다. 각각의 집들은 그 시절 내게 꼭 맞는 집이었다. 정신승리형 인간이 아닌데도 지나온 집에 관한 기억이 모두 좋아 왜 그런지 생각해 봤다. 집이 회사와 가까워지고, 조금씩 넓어지는 만큼 나도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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