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인생 첫 선생님
— 학교 엄마, 장문자 선생님
만 여섯 살이던 1972년 3월 부산 광무국민학교에서 인생 첫 선생님을 만났다. 장문자 선생님은 한글은커녕 숫자도 잘 세지 못하는 이른둥이인 나를 딸처럼 보살펴주셨다. 모든 게 느리고 서툰 내게 방과 후에 따로 수업을 해주셨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후 우리 집과 가까운 쪽 학교 담장으로 가면 둘째 손을 잡고 막내를 업은 엄마 얼굴이 보였다. 짜장면값 30원을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공부했던 기억은 없는데 담장 너머로 엄마에게 돈을 받던 장면과 맛난 짜장면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하루는 엄마가 내 책가방을 정리하다 첫 시험지를 발견했다. 그런데 한 시험지에 점수가 2개였다. 빨간색은 60점대, 주황색은 80점대로 채점된 시험지였다. 엄마가 연유를 물었는데 나는 80점대 점수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보통의 아이라면 70점 이상은 받을 수준의 시험이었다. 주황색 점수는 방과 후 수업에서 틀린 부분을 공부한 후 같은 시험지에 다시 친 시험이었다. 그런데도 시험점수 때문에 혼난 기억은 없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월요일, 쨍쨍한 햇살 아래 운동장 조회가 길어지면서 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양호실에서 눈을 떴을 땐 겁에 질린 얼굴의 엄마가 있었다. 어찌 보면 장 선생님과 엄마는 1년간 나를 공동 육아한 셈이었다. 중학생이 된 후 엄마는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첫딸을 한 해 일찍 학교 보내고 둘째와 막내 건사하기도 버거웠던 엄마에게 장 선생님은 친정 언니 같은 선생님이었다. 느린 아이를 기다려준 선생님과 부모님 덕에 나는 초등 5학년 무렵에야 이른둥이 티를 완전히 벗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엄마와 때때로 장 선생님 이야기를 나눴지만 찾아뵐 엄두를 내진 못했다는 것이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혼자 찾아뵐 용기가 없었다. 3학년 때 이사하면서 같은 국민학교 친구도 주변엔 없었다. 그렇게 마음으로만 그리워했던 선생님. 나이 들어 넉살이 좋아졌을 때 찾아보니 학교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교육청 ‘스승 찾기’ 서비스도 재직 중인 선생님에 한해서였다. 어영부영하다 선생님을 찾아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감사든 사랑이든 미루면 안타까움만 남는다.
인생 첫 선생님으로 장문자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글과 가까운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촌지가 공공연히 오가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외벌이인 아버지 월급으로 세 아이를 키우고 시댁 생활비까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짜장면값 30원도 우리 집 형편엔 적지 않은 지출이었다. 한 반 학생 수가 70명이나 되던 시절, 모든 게 느리고 말귀도 어두운 아이에게 시간과 애정을 쏟으셨던 선생님. 내겐 더없는 행운이었지만 보답할 기회를 흘려보낸 건 못내 안타깝다.
“50년도 더 지나서야 소리 내 불러보는 장문자 선생님. 단아하고 기품 있으셨던 선생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은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지만 사진 속 인자한 얼굴은 제가 어른이 된 후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선생님은 제 인생 유일한 참스승이셨어요. 진정한 어른으로서 갓 서른의 서툰 엄마와 미숙한 아이였던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은 겨우 1년이었지만 그 시간 덕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이제 구순이 넘으셨겠군요. 엄마를 잃고서야 어린 시절 제게는 학교 엄마였던 선생님을 추억합니다. 일찍 찾아뵙지 못한 못난 제자는 기억 못 하셔도 괜찮아요. 부디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