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가을날의 운동장
―엄마에게 그 가을이 따뜻했기를
어김없이 그날이 왔다. 운동장은 더없이 넓고 출발선에 선 내 머릿속은 이미 하얘졌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한 가운데 난 온몸이 귀가 된 듯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탕”하는 총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뒤늦게 다른 주자들을 따라 달렸다. 몇 미터 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발바닥이 아파왔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 오래 달리기.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이미 다른 주자들은 운동장의 첫 번째 코너를 돌고 있었다. 달릴수록 앞 주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출발지점과 대각선 방향에 있는 두 번째 코너를 향할 즈음엔 앞선 주자들은 이미 세 번째 코너를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 코너에선 다른 반 주자들이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반 주자들을 쫓아 세 번째 코너를 향해 달리는데 등 뒤에서 또 한 번 총성이 울렸다. 두 번째 코너에서 출발한 다른 반 주자들이 우르르 내 뒤를 쫓아 달려왔다.
뭐든 시작한 이상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걸 일곱 살 때 이미 알았던 걸까. 내 앞에 펼쳐진 운동장은 가을 햇살 때문인지 해운대 백사장보다 더 눈부시고 더 광활했다. 게다가 다른 반 주자들이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지 어느새 거센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아, 큰일 났다.’ 공부만 힘든 게 아니었다. 출발 총소리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쿵쾅대던 심장은 달리기가 시작되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겨우 만 여섯 살이었다.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음력(2월)으로 하는 바람에 난 숫자도 제대로 세지 못한 채 만 여섯 살에 입학했다. 모든 게 서툰 내가 걱정된 엄마는 아침 설거지가 끝나기 무섭게 막내를 둘러업고 내 뒤를 밟아 학교로 왔다. 수업 시작 전 아침 자습 시간 과제를 제대로 하는지 복도 창밖에서 살피기 위해서였다.
‘5쪽~7쪽까지 세 번 쓰시오.’ 다른 아이들은 휘리릭 과제를 해놓고, 간혹 하지 않고도 책상 사이를 뛰어다니고 몇몇 남자아이는 책걸상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날아다녔다. 한 반 학생수가 60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그런 난장판에도 자리에 붙박이처럼 앉아 있는 딸을 지켜보던 엄마는 결국 교실 뒷문으로 들어왔다. “J야, 뭐 하노? 저거(자습 과제)는 다했나?” 반가운 엄마의 등장에 눈물을 글썽이던 그때, 난 과제 3번 쓰기도 힘에 부치던 아이였다. 겨우 두 번을 써놓고는 과제를 마치지 못했으니 자리를 뜰 엄두도 못 낸 채 책받침에 별만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두고두고 그걸 신통하게 여겼다. 한글도 미처 떼지 못한 아이가 그 어려운 별은 잘 그렸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러고 여름방학 지나 맞은 가을 운동회날, 운동신경도 공부 머리만큼이나 둔했던 아이가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두 번째 주자들이 내 뒤를 쫓으면서 꼴찌였던 나는 1등으로 달리는 모양새가 됐다. 애태우며 눈으로 나를 좇는 엄마가 있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 다른 반 주자들에게까지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세 번째 코너를 돌 땐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죽을힘을 다해 달린 덕에 간발의 차로 1등 같은 꼴등으로 골인했다. 내 손등에도 ‘참 잘했어요’란 보라색 도장이 찍혔다. 그 손을 의기양양하게 들고 김밥과 과일을 싸 온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날의 김밥은 내 생애 최고의 김밥이었다.
훗날 엄마에게 들으니 건성으로 달리기를 보던 동네 친구 엄마는 사람 속도 모르고 “딸내미가 1등이네요” 했다고 한다. 모든 게 느리고, 몸도 약했던 큰딸 때문에 엄마는 항상 긴장 속에 살았다. 가을날의 첫 운동회는 시작에 불과했다. 소풍, 운동회, 수학여행 때마다 엄마는 수없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간 경주에서 쓰러지고, 첫 체력장을 준비하다 쓰러지고, 800m 달리기를 하다 쓰러지고…. 엄마가 나를 키우는 과정은 겨우 걷는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들어가서도 시름시름 아파 학교보다 병원 순례하느라 더 바빴다. 원인을 찾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야 ‘고3병’이라는 병명이 신문에 처음 등장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 공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됐다. 모든 게 느렸지만 아픈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엄마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서울에 정착한 자녀들 성화에 부산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은 15년 정도였을 것이다. 젊은 날의 엄마를 내내 가슴 졸이게 한 못난 딸에게 그 시절의 불효를 만회할 시간은 겨우 15년이 전부였다.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세 번의 가을을 맞았다. 엄마와 다시 한번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옛날의 그 운동장을 찾고 싶다. 거기서 젊은 날의 엄마를 다시 만나고 내 옆에 선 여든둘의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다. 당신의 삶이 고됐던 시간만큼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옛날의 허약했던 아이가 이젠 보통내기가 아닌 중년이 됐다고. 이렇게 나이 먹었어도 엄마의 김밥은 여전히 세상 제일 맛난 김밥이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