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104세 할머니의 스카이다이빙
―움츠린 채 생각만 많은 나에게
지난해 회사를 그만둔 후 신문도, 뉴스도 안 보게 됐다. 정치 기사는 지리멸렬했고, 나날이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사건‧사고 기사는 클릭하기가 무서웠다. 그러다 며칠 전 스마트폰에서 눈에 띈 기사를 나도 모르게 클릭했다.
미국 시카고의 104세 호프너 할머니에 대한 기사였다. ‘푸른 창공에서 지상으로 자유 낙하하는 기분’을 한 번 더 만끽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며 ‘세계 최고령 스카이다이버’로 등극한 지 8일 만에 영영 하늘로 돌아갔다는 기사였다. 호프너 할머니는 지난 1일 생애 두 번째 스카이다이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네스 협회 공식 인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100세 때 처음 스카이다이빙을 했는데 당시 전문가에게 떠밀려 뛰어내린 것이 아쉬워 재도전했다고 한다. 지난 1일 전문가와 함께한 다이빙 때는 주도적으로 점프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고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내가 살아온 날의 두 배를 살아낸 할머니의 삶이 궁금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스카이다이빙은 어떤 의미였을까. 100세에 스카이다이빙을 꿈꾸고 첫 다이빙을 시도한 도전정신이 1세기 넘게 그녀를 살게 한 원동력 아니었을까. 내겐 시 수업이 그랬다. 시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50대 중반에 시도한 도전이었다. 여전히 가슴 떨리는 도전....
마침 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호프너 할머니 기사를 언급하면서 소감을 나누게 됐다. 50대인 내가 거의 막내일 정도로 어르신이 대부분인 수업이었다. 몇몇 어르신은 호프너 할머니의 도전이 멋있다고 했다. 그런데 칠순 전후로 보이는 한 수강생에게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한 번의 스카이다이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라면 하루라도 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
선생님이 그 기사를 언급한 의도는 뒤늦게 시 공부에 뛰어든 수강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온 것이다. 선생님은 그 수강생에게 다시 질문했다. 당신이 104세라면, 그동안 염원해 왔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시도해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그래도 칠순 즈음의 수강생은 완강했다. 한두 번 스카이다이빙했다고 스카이다이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호프너 할머니가 스카이다이빙 같은 위험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더 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호프너 할머니의 시도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평생을 가족(특히 자식)을 위해 동동거렸을 연배인 그녀에게 가족은 그녀의 모든 것인 듯했다. 과연 그녀의 가족도 그녀와 같은 생각일까.
인간이 삶의 여러 고난을 버텨내는 에너지의 근원이 가족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도 ‘따로 또 같이’가 되지 않으면 힘이 아니라 서로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닐까. 나는 지금 가족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는 긴 여정의 도중에 있다. 한 발짝 떼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마다 지구가 온 중력을 내 발등에 걸어놓은 듯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병중인 친정 부모님과 우울의 늪으로 빠져드는 시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무기력해질 때가 많다.
내 안의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이 들 때마다 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시 수업도 그런 회피와 도망의 한 수단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눈만 다락같이 높아져 글도, 시도 써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게 곁을 주지 않는 글의 주변부를 맴돌기만 했다. 어디에도 숨어들 곳을 찾지 못한 아이 같은 마음일 때 호프너 할머니 기사를 접했다. 100세에도 스카이다이빙을 시도하고, 그 시도가 성에 차지 않아 4년 후 다시 도전한 그녀는 나이는 나보다 2배로 많지만, 그 긍정성과 추진력은 20배, 200배쯤은 되는 듯하다.
이미 영면에 든,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먼 나라의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넌 겨우 50대일 뿐이야,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아, 일단 해 봐, 정 아니면 또 다른 길을 가도 돼, 라고 말이다. 고글을 끼고 환한 얼굴로 다이빙 중인 할머니가 다정스레 말한다. 대단하게 타고난 것도 아니고, 뭐가 꼭 돼야 할 필요도 없는데 뭐가 무서워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주저앉기부터 하느냐고. 인생 대선배인 할머니의 삶이 다시 한 발을 내딛는 용기를, 단번에 되지 않아도 또 시도하면 된다는 긍정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오래 움츠렸던 몸을 펴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