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란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 혹은 자신의 심리나 경제 상태가 좋지 않음을 뜻한다. 금수저의 반대. - 국어사전 -"
흙수저란 말이 어느 순간 나타나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이제 국어사전에도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 혹은 자신의 심리나 경제 상태가 좋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이죠. 반대말로는 금수저가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수저 계급론이 있습니다. 과거 노예, 귀족, 왕족 등 부모의 계급(핏줄)으로 신분이 나뉘던 것이 현대 사회에 들어와 수저의 재질로 신분이 나뉘게 된 것이죠. 물론 수저의 재질은 부모의 재력이 주요한 영향을 줍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타파된 지 10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대 사회에 들어와 어떻게 비공식적인 신분제가 다시 시작되고 있을까요?
현대 사회,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선진국의 제도이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대다수 채택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죠. 3저 호황, 88 올림픽 등 80~90년대 당시만 하여도 4년제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에 취업에 무리가 없었습니다. 스펙 경쟁이 사실상 없었죠.
하지만 세상은 금세 변화했습니다. 지금의 20~30대들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취업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자동화, 인공지능, IT, 3차 산업혁명 등. 더 이상 기업의 성장에 있어 과거와 같이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죠. 기업에서 뽑을 사람은 당연히 더 줄게 됩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탈락자가 필요하고, 채용 기준을 높여야겠죠. 자연스럽게 학벌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조건들이 상향 평준화되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능력, 공부(노력)만으론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집안의 재력과도 직결됩니다. 타 조건을 상향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자원의 투입은 필수이기 때문이죠. 물론, 과거에도 집안을 보았습니다. 입사지원서에 부모의 직업, 나이, 학력, 사는 곳, 재산을 적는 란은 필수였죠. 하지만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원자가 스펙을 쌓을 기회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이러한 변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흙수저라는 단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수저의 재질에 따라 현대판 신분 계급을 나누게 됩니다.
흙수저, 왜 많은 단어 중에 흙수저일까요? 우린 밥을 먹을 때 수저를 이용합니다. 보통 단단한 금속 재질로 이루어져 있죠. 단단한 재질이 아닌 흙으로 된 수저로 밥을 먹는다. 밥은커녕 수저가 금세 가루가 되어 입안에 흙만 가득 들어가겠네요.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에 반해 금수저는 밥을 먹기가 편하겠죠. 현세대가 느끼는 불평등과 절망, 그리고 불만.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흙수저로 태어났다는 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노비로 태어났다는 것과 비슷한 기분일까요? 그렇다면 그 기분과 느낌,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정신세계는 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흙수저라는 프레임은 사라진 신분제를 현실로 부활시킨 것과 같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사회는 과거와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질적, 제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민의식도 성숙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하 1인 1표가 보장되며, 신분제는 먼 옛날 철폐되었습니다. 과거 양반과 노비가 살던 시대에 법과 제도로 규정된 불평등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불평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 불평등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은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빈부 외에도 보이지 않는 불평등적 요소가 많죠. 사는 곳(지역), 나이, 성별, 학력, 직업 등 환경적인 요소들. 저는 이러한 요소들이 낳은 불평등이 모여 정신적 부분까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정신 외적 요소들이 정신까지 영향을 미쳐 보이지 않게 무의식의 깊은 곳을 바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사는 곳을 한번 볼까요. 지방(시골)과 서울(도시)의 차이를 생각해보시죠. 시골에 사는 A라는 청년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주말에 날을 잡고 대도시로 나가야 합니다. 장을 보기 위해 읍내로 나가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죠. 어쩌면 어린 시절 A에게는 하나의 즐거운 이벤트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친구의 눈엔 고생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이것을 조금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켜보겠습니다. 성인인 B가 있습니다. 수도권(대도시)에 거주 중입니다. 주말에 오랜만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습니다. 약속 장소를 보니 이번에도 역시 강남이네요. 모임이 있으면 약속 장소 후보로 항상 서울 주요 도심지가 거론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멤버보다 외곽에 거주하는 멤버가 더 많을 때도 말이죠.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당연한 것이 되었죠. 서울 친구는 거리가 가깝습니다. 모임 장소까지 가는 비용과 시간 모두 수도권 친구들보다 적게 들어갑니다. 수도권 친구들은 당연히 그 반대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이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만약 지방에 거주하는 멤버가 추가된다면 큰 변화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작은 불평등으로 느끼시나요? 단어를 바꾸어 불공정이라 한다면 어떠신가요? 만약 불평등(불공정)이라면 이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불평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시간과 비용의 가치가 다른다는 것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작은 차이가 점점 커져가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정신(생각)까지 연결됩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당연하게 돼버린 것. 그 당연한 것들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 그에 대해 질문(생각) 하고자 하지 않는 것.
원인은 다양합니다. 사는 곳은 하나의 예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경제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범위를 좁혀 서울 안에서도 강남과 강북이 나뉠 수도 있습니다. 환경에서부터 시작되는 차이.
환경은 차이를 만들까요? 어린 시절 사는 곳에 따라 성장 과정에서 큰 차이가 날까요?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직업이 다르면 아이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부모의 직업과 자녀의 삶의 연관관계. 부모의 직업에 따라 부모로부터 들을 수 있는 조언의 차이. 거주하는 지역의 선생님, 가족, 친구들이 변화함에 따라 아이가 받는 영향의 차이. 그리고 그 영향을 주는 사람들 또한 그 이전에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 끊임없는 매개 관계의 형성. 맹모삼천지교란 단어가 나온 이유? 이것은 과연 문명(인터넷)의 발전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현실이 더 냉혹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앞서 서술한 이야기들은 더 고착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적 언급을 하지 않지만 현시대의 환경적 차이와 경제적 차이는 정신적 차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현재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상교육, 공교육 제도, 높은 교육열, 평준화, 인터넷, 유튜브 등 극복할 수 있는 많은 제도적, 물리적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습니다.
코끼리의 일화를 아시나요? 서커스단에서 태어난 코끼리는 어린 시절부터 밧줄에 발목이 묶여 성장합니다. 이후 코끼리는 성체로 다 성장한 이후에도 해당 밧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체가 아닌 정신이 밧줄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나갈 수 있는 한계를 그어버린 것이죠. 우리 사회도 지금 그렇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흙수저란 밧줄은 단순히 경제력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픈 사실은 현대 사회에 이미 상당수 계층(경제적) 사다리가 끊겼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불공정(불평등)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는 점점 음지에서 양지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음지에 있던 불공정함은 이제 법과 제도를 통해 양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돈이 곧 능력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역량 중 육체적, 정신적 역량뿐만 아니라 경제력이 하나의 큰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경제력은 어린 시절부터 차이를 만듭니다. 영어 유치원, 사립 유치원, 사립학교, 어학연수, 사교육 등. 대학 입학뿐만 아니라 취업까지 경제력이 영향을 미칩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하 이러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보완책도 많이 나왔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다양한 전형(루트), 제도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다양한 전형이 도입되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그 취지를 보면 대부분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형 다양화는 기회의 공정이 아닌 기회의 불공정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도의 취지는 좋지만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그들이 설계한,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전형.
일부 전형은 대다수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도 접근 기회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제도가 있다는 정보마저 모를 수 있죠. 경쟁을 하고 싶어도 경쟁을 할 수 없는 분야가 있습니다. 너무 과장한 것 같나요? 현실을 알면 알수록 더 놀랄 수 있습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럴수록 흙수저로 대표되는 수저론도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자(기득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편 가르기를 하고 우리편과 상대편을 구분할 것입니다. 깃발을 들고 양쪽에서 사람을 모을 것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우리편을 위한 법과 제도를 구축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만을 위한 법과 제도가 1순위겠지요.
흙수저, 수저론, 흙수저의 탄생, 작은 차이가 만들어가는 변화, 이것들이 정신(무의식)에 미치는 영향, 현실 세계와 앞으로 벌어질 미래, 이것들 이용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갈 세계. 이 모든 것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바로 변화할 수 없더라도 정신적으론 바뀌어야 합니다. 진정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당장의 경제적 상황이 아닌, 나도 모르게 정신적 흙수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흙수저를 전 진짜 흙수저라 정의하겠습니다.
경제적 흙수저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준은 자의적이고 또한 상대적입니다. 흙수저끼리 모여있으면 그중 누군가는 상대적 금수저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볼 때 흙수저더라도 본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흙수저의 기준을 경제적으로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규정된 명확한 기준도 없습니다. (물론 인터넷에서는 흙수저를 판단하는 체크리스트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 저는 흙수저를 판단하는 진짜 기준은 정신적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까지 완전하게 장악당한 사람, 사회에서 만든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
진짜 흙수저.
진짜 흙수저란 정신적 측면, 즉 무의식까지 완전히 장악당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나온 정의대로 단순하게 부모의 경제력만을 바탕으로 흙수저를 구분 짓는다면 그건 오히려 그들 자신이 아닌 부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잘못된 현 상황의 모든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고 그들의 부모를 비난하고 탓하며 살 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원인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자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환경만을 탓하며 발전 없이 한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흙수저라는 프레임이 갖는 힘과 그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이 갖는 어려움을 경제력만으로 국한시키기에는 정신적 영역의 비중이 너무나 큽니다. 흙수저의 사고, 흙수저의 정신을 갖게 된 이유는 다양합니다.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진짜 흙수저가 된 사람은 모를 수 있습니다. 결과와 과정 그리고 이유까지. 알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대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죠. 정신적 측면은 서서히 물밑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잠식해 들어왔습니다. 프레임에 갇힌 자. 흙수저와 가난,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인식, 상대적 박탈감. 정신이 지배당하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폭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특정인은 도전도 하기 전에 본인의 한계를 정해버리겠죠. 사고의 한계가 현실의 한계로 이어지는 그 순간, 정신이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진짜 흙수저가 되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자, 기득권 계층, 그들이 깃발을 들고 편을 나눌 때. 그들이 특정 프레임을 만들어 놓았을 때.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구조와 경쟁에 나도 모르게 참여했을 때.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것을 벗어나기 힘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과 생각은 밖에 나와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전에 그들의 짜 놓은 프레임, 만들어 놓은 구조 속에 나를 쉽게 던지면 안 됩니다. 수동적으로 삶이 흘러가버리게 두면 안 됩니다. 주도적으로 답을 구하고, 주체가 되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몸은 그 안에 있더라도 정신은 밖에 나와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구조와 프레임은 강력합니다. 물질적, 경제적으로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신세계까지 영향을 미쳐 우릴 규정하고 가둘 수 있습니다. 많은 이가 흙수저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구조와 사회적 환경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흙수저의 사고, 가난한 자의 사고로는 흙수저의 삶을 쉽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는 다수의 흙수저에게 한정된 기회를 제공하여 일부의 동수저와 은수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 가혹한 경쟁 체제에 나를 던지면 안 됩니다.
근면성실, 주인의식. 기업에 입사하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소개서에 자기를 어필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회사는 이런 지원자, 근로자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권유합니다. 주인의식을 생각해보시죠. 주인의식을 강요하지만, 그들에게 대다수 근로자는 주인이 아닌 노예입니다. 주인은 경영자(오너) 자기 자신이죠. 노예처럼 부리지만 주인의식을 강조합니다. 회사가 망하면 누구의 잘못일까요? 전 경영진(오너)의 잘못된 판단과 경영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경영진이 구조조정을 통해 대다수 근로자를 해고하죠. 원인의 제공자와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잘리지 않습니다. 임금은 일반 근로자의 100배 이상 받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들은 근로자를 절대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고용된 근로자들이 부자가 되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둘게 예상되기 때문이죠. 근면성실의 끝은 무엇인가요? 정년퇴직인가요? 구조조정에서 회피하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가 결정된다는 것 아닐까요. 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한평생 근로를 통해 벌 수 있는 부의 총량이 정해져 버리겠죠. 즉, 부의 한계가 그어질 것입니다. 더 많은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야겠죠. 이 또한 근면성실로 대표되는 그들의 프레임입니다.
정부 정책은 항상 옳을까요? 항상 따라야만 할까요? 여러분이 지지하는 정권에 따라 다른가요?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기준을 가지셔야 합니다. 2016년부터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자 정부에선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때마다 각종 통계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집값이 안정화될 것이다. 집값은 떨어질 것이니 집을 사지 마라. 지금 영끌해서 집을 사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안타깝다. 등등.
여러분이 경험한 현실은 어떻게 됐나요? 정부의 말만 믿고 내집마련을 미룬 사람들은 전세난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소득보다 집값이 더 빠르고 크게 상승하여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발생했습니다. 이중 일부는 정부를 원망합니다. 또 일부는 집을 갖은 자들을 투기꾼이라 욕하며 폭락론자로 변했습니다. 그때 집을 산 사람들은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모두가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른 것은 아닙니다.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케이스가 있겠죠. 하지만 현실에서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 정책의 영향을 피해 가긴 어렵습니다. 정책과 더불어 정치인, 고위 관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다수 국민이 큰 영향을 받습니다.
친한 친구가 집값 급등 뒤에 탄식하며 저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침몰하는 배가 있다. 선장이 승객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선장과 선원들은 대피하고 있다. 넌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리를 지키고 그대로 있으실 것인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가 점점 더 깊게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만 믿고 기다리실 것입니까? 여러분의 생사가 달려있습니다. 판단하십시오. 결정을 내리십시오. 결정의 근거와 주체는 누구입니까? 판단을 남에게 미루실 건가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의견은 참고사항일 뿐, 그 말에 내 삶의 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의 의견이고 목소리이지 내 의견이고 목소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미래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상황을 살펴보고 판단하여 결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흙수저 반란.
벗어나는 것입니다. 정신적 흙수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만든 당신의 무의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경제적 상황을 당장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정신적 흙수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인 변화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내 삶의 주체가 되어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쟁취하는 것입니다. 구조에서 벗어난 삶, 프레임에서 벗어난 삶. 주입된 생각에서 벗어나 나의 생각, 나만의 온전한 사고를 하는 것.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것. 부자를 원한다면 부자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