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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대여성 Oct 11. 2020

아빠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아빠를 보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바뀐다. 사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는데 강아지를 키우면서는 아빠 품에 안겨있는 녀석을 핑계로 얼굴을 종종 보곤 한다.




올해 내가 본 아빠의 얼굴은 외로움이었다.


취미생활도 달마다 만나는 친구도 없는 아빠의 유일한 활동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영화 채널 감상이다. 퇴근 후, 주말마다 아빠는 늘 거실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면 다른 채널들을 몇개 돌려보다가 잠이 든다.




집이 비었던 어느날, 온 집안을 오롯이 혼자 점령할 수 있다는 짜릿함에 밤을 새기로 했다. 이런날은 괜히 잠들기가 싫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도 하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58번을 시작으로 하나씩 아래로 채널을 돌렸다.


꼬박꼬박 6번 채널까지 내려간다. 볼만한게 없다. 보고싶은 것도 없다. 그냥 껐다. 글을 끄적이고 잡생각을 하다가 몇시간뒤 다시 TV 앞에 앉았다. 58번부터 6번까지 쭈욱 내려본다. 아까 하던 재방송이 또 재방송을 하고 있다. 재방송의 재방송만 가득한 채널들. 좀 볼만한 채널에 정착하면 광고가 나온다. 지겨워서 또 그냥 꺼버렸다.




문득 혼자 거실에 있을 때면 멍하니 TV를 켜서 영화를 보던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그것들이 정말 재밌었을까 궁금해졌다.


다정하고 섬세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아빠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잘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말수도 별로 없어서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아무런 말도 없이 정말 밥만 먹는다. 이런 분위기가 숨이 막혀 빨리 먹어버리거나 배고픈 것을 참았다가 나중에 혼자 따로 먹기도 한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약자를 돕는다. 성실함의 표본이 있다면 아빠일까 싶을 정도로 본인이 맡은 바는 묵묵히 잔꾀 부리지 않고 해낸다. 깔끔한 성격에 정교한 손기술이 있어 아빠가 뭘 하면 그것들은 늘 반짝이고 각이 살아있다. 항상 본인보다 남을 생각해서 뭐 하나를 먹더라도 본인이 늘 덜 먹고 뭘 같이 쓰더라도 본인이 덜 쓴다. 장을 볼 때도 본인 먹고 싶은 음식보다는 가족들 먹을 음식들을 먼저 집는 사람이다. 필요 이상으로 남을 배려하고 헌신하는데 익숙하다. 인생에 어떤 요행을 바라는 사람도 아니다.




저녁 식사 때 곁들인 소주 때문인지 취기가 살짝 깃든 눈으로 맥없이 영화를 보는 아빠를 본 적이 있다. 그날은 방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듯한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방에서 혼자 조용히 주륵주륵 눈물을 흘려댔다.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회장, 부회장, 체육부장을 하며 나름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할 때도 대놓고 기뻐하지 않았고 1년 바짝 공부해서 들어간 인서울 합격 소식에도 별다른 축하를 해주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후 몰래 아빠 술을 훔쳐 마셔도, 밤새 놀고 아침에 들어오는 나를 마주쳤을 때도, 대학생 때 여러 방면으로 속을 뒤집어 놨어도, 취업을 하지 않고 대뜸 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도, 일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며 백수생활을 유지할 때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내가 예상대로 흘러가거나 흘러가지 않아도 아빠는 늘 감정의 널뜀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집 밖의 일보다는 집 안의 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된 사실은 아빠는 감정에 무딘 사람이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이 나와 달랐을 뿐, 아빠의 방식대로 많이 웃고 울었다는 것이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사는게 퍽퍽했던 시절, 딱 내나이쯤 아이를 둘이나 가졌던 아빠는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100세 인생 시대라고 했을 때, 앞으로 남은 40여년의 세월은 아빠에게 살아내야 하는 시간들일까 아니면 살아갈 시간들일까. 난 아직 덜 성숙된 인간인데 아빠의 얼굴에서 슬픔과 외로움을 봐도 되는걸까. 품어주고 들어줄 준비가 안된 사람인데.




마음의 계절이 정신의 계절보다 앞서갈 때면 그간 채비를 하지 않은 것을 탓하느라 자책하는 시간들이 늘어간다.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후회만이 쌓인다. 알면서도 안된다. 다짐과 자책만으로 삶이 지속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내가 겪을 계절들을 먼저 지나간 아빠의 다음 계절은 따뜻한 봄일까. 아니면 모든것을 꽁꽁 감싸야 하는 겨울일까.


이왕이면 아빠의 4계절은 늘 봄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봄날이면 아빠를 모시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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