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살림은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은 하는 것입니다.
'살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1. '할 줄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지만,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설거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요리도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청소도 대부분의 사람이 할 줄 압니다. 그런데 살림은 하는 입장에서 "할 줄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살림도 잘해야 합니다. 한 번에 깔끔하고 센스 있게 신속히 끝낼 줄 알아야 합니다. 설거지를 한 그릇이 미끌거리고, 청소를 한 바닥에 먼지가 보이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살림을 하던지 담당한 일은 두 번 손이 가지 않게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분들이 "할 줄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업무를 하는 분들도 집에 와서 하는 살림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숙달되어서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는 것을 우리는 "전문성"이 있다고 합니다. 살림에도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살림이든 능숙하게 잘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 우리가 그 살림의 공급자이자 수혜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잘해야 우리가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주부"라고 부릅니다. 적절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주부는 다른 멤버에 비하여 살림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습니다. 살림을 능숙하게 잘하고 잘 마무리합니다.
내가 어떤 살림을 할 줄 아는 것과 주부가 그 살림을 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까먹지 않아야 합니다.
2. 일의 우선순위 파악에 대한 경험과 지혜를 쌓는데 오래 걸린다.
'주부'라고 해서 모두가 모든 살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찾아보고 반복하여 살림을 하면서 숙련도가 쌓이고 경험과 지혜가 쌓입니다. 초보 주부 시절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합니다.
문제는 "살림학"과 같은 학문이 없어서 효율적으로 관련 지식을 신속하게 익히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 웹사이트와 여러 유튜브 동영상이 있어서, 개별 사안의 살림에 대한 참고자료는 꽤 있는 편이지만 체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지식과 지혜가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맨땅에 헤딩하면서' 살림을 익히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나 할머니 등 선배 주부에게 물어보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책과 논문처럼 "형태지식"이 아니라 말과 경험에 의존하는 "암묵지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하고 계량화 된 지식으로 전달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비효율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경영에 대한 전문 분야별(회계, 재무, 마케팅, 인사 등) 이론적 체계가 정립되어 있듯이, 가정의 살림에 대하여도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3. 휴식시간이 짧고 또한 불규칙하다.
살림을 할 때의 어려움 중 하나가 휴식시간이 짧으면서 불규칙하여 충분한 휴식을 챙기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집안 청소를 다 끝내고 차를 한 잔 마시겠다고 물을 끓이는 순간, 식기세척기 속에 건조된 식기를 봅니다. 식기를 정리하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잊고 있었던 빨래 거리가 생각납니다. 차 한 모금을 마시면서, 세탁기를 돌립니다.
오늘따라 세탁실이 유독 우중충합니다. 간단하게나마 먼지를 쓸어냅니다. 세탁세제가 간당간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차 한 모금하면서, 인터넷으로 세탁세제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하필 쿠폰을 발급받으면 10퍼센트 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 들어가지 않는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쿠폰을 받습니다. 세제를 주문하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십니다. 차는 어느덧 식어 있습니다.
휴식시간을 온전히 휴식을 위해 100%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잠깐 쉬는 시간에도 해야 할 일이 계속 떠오르고, 해야 할 일이 눈앞에 계속 아른거립니다. 근로자는 50분 일 하면 10분 휴식하도록 법과 제도가 있지만, 살림을 할 때에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4. 모든 시간이 살림의 대기 시간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도 끊임없이 사건, 사고가 발생합니다. 물을 쏟기도 하고, 누구가 다치기도 하며, 오래된 것이 썩어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돌발상황에 면밀히 대처하고 수습하는 것도 대부분 주부의 몫입니다.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잘 갖고 다니던 학원 가방이 실종되기도 하고, 가방에 잘 있던 공책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학원에 연락하고 사정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주부의 몫입니다.
살림을 하는 중에도, 잠깐 쉬는 시간에도 돌발 상황은 발생합니다. 우선순위가 꼬이고, 일정이 틀어집니다. 그러나 살림은 이를 양해하고 고려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발상황도 수습하고 원래 해야 했던 살림도 늦지 않게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대신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를 의무소방원으로 소방서에서 26개월을 보냈습니다. 소방관이 소방서에 대기하는 시간도 업무시간으로 봅니다. 언제 어디서 화재, 구조, 구급사고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기하는 것도 업무입니다.
살림도 비슷한 맥락이 있습니다. 늘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갖고 있습니다. 언제든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살림을 해야 합니다. 평소에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건, 사고에 대한 대기를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5. 살림에 익숙해지면 심리적인 종속 상태가 형성된다.
위 1~4번에 따라, 살림에 대한 전문성이 쌓일수록 살림에 대한 심리적 종속 상태가 공고화됩니다. 좀 멀리 놀러 가려고 하면 당장 가족의 밥을 챙겨 놓고 가야 마음이 편합니다.
가장 잘하고 전문성이 있는 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가족 멤버들은 사소한 일이 발생하기만 하면 주부를 가장 먼저 찾습니다. 가장 빠르게 깔끔하게 그 사소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내가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굶을지도 몰라, 아니 먹더라도 대충 먹을지 몰라'라는 생각에 항시 대기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끼 대충 먹어도 괜찮고, 한 끼 배달시켜 먹어도 괜찮습니다. 며칠 살림을 하지 않아도 집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부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더 잘 챙겨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림은 일이 일에서 깔끔하게 끝나지 않고, 관계와 감정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6. (결론) 살림이란 업무, 살림하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인식이 필요합니다.
살림을 하는 것은 빛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림을 하는 결과가 "현상유지"이고 "가족의 건강"이기 때문에 쉽게 그 노력을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하면 바로 티가 납니다. 두루마리휴지는 어떻게 그렇게 자주 떨어지는지, 치약과 칫솔은 왜 그렇게 다들 각자 다른 브랜드를 쓰는지, 수건은 넉넉할 때는 넉넉하다가도 하필 모자랄 때는 왜 그렇게 빠듯한지... 잘하는 티는 나지 않지만, 모자라면 바로 티가 납니다. 부족한 티만 날 뿐, 노력의 빛은 결코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살림도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입니다. 항시 대기업무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 역할입니다. 사건, 사고를 수습하는 담당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림이란 업무, 살림하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합니다. 전문가에 대한 합당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이상과 같이 짧은 견해를 남깁니다.
덧. "가족이 건강하다"면 살림하는 사람의 노력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