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난다. 나, 당신과 같은 대다수 서민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우리사회 곳곳에 있지만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2018년 증평 모녀 사건, 2019년 망우동 모녀 사건과 북한이탈주민 모자 아사 사건이 그렇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일반화하고 싶지 않지만) 가난의 여정은 아주 자주 안타까운 결말로 귀결된다. 누군들 가난 때문에, 돈이 없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겠는가.
위기가구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위기가구’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을 정부도 안다. 역대 정부마다, 특히 현 정부에서는 위기가구 발굴을 위한 여러 정책을 계속 펴왔다. 문제는 항상 정책이 현실을 커버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 때문에 발생한다.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보다 새로운 위기가구나 위기세대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구조, 1인 가구의 증가, 전통적 가정의 해체, 소득 불균형 심화, 청년 실업…. 신(新) 위기가구는 이런 사회변화와 양극화의 그늘에서 잉태된다. 원하지 않게 위기가구 혹은 위기세대가 되어 버린 이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때때로 가난이 만들어낸 불행한 종착지, 빈곤을 돌고 도는 급행열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의로 이 열차에 탄 이들은 없을 것이다.
나는 피라미드에서 A를 만난 적이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가 아닌 서울 강북에 있었다. 맞다. 다단계로 불리는 그 위험한 조직. A는 그처럼 멋모르고 끌려오거나 혹은 가난에 시달리다 한 방을 바라고 온 ‘신입’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50평 남짓한 사무실을 가득 채운 수십 개의 의자와 분주하게 오가는 이들. 서류에 뭔가를 적는 사람, 검은색 넥타이를 맨 남자는 쉴 새 없이 통화를 했다. 앞에 앉은 사람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육. 좁은 회의실에 빼곡하게 들어선 이들은 대부분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앞줄에는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A는 검은색 정장치마와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막힘없는 언변. 그러나 어쩐지 그녀는 우울해 보였다. A는 마이크를 쥐고 일장 연설을 했다. 사람을 많이 끌어 모을수록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다고 여러 번 말했다. 돈, 수익, 성공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누구는 박수를 치고, 또 다른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도 놓칠세라 필기를 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품안의 녹음기가 잘 작동하는 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앉은 중년 남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공무원이었다는 그는 명함을 주면서 꼭 연락하라고 했다. 그는 은퇴 후 “진짜 할 일’을 찾았다”고 했다. 자리를 뜨는 나를 보며 남자는 활짝 웃었다.
대화를 청했다. A는 여느 신입 직원의 면담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찻잔이 식어가는 동안 그녀는 왜 자신이 다단계에 뛰어들었는지를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이야기는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현재의 선택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 그러니 당신도 나를 따라 열심히 다단계에 충성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확신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A의 뺨은 창백했었다고 기억한다.
A는 대학 졸업 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과외를 하면서 중등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학원비는 비쌌다. 그래서 비교적 저렴한 인터넷 강의로 수업을 대신했다. 생활은 항상 어려웠다. 용돈과 생활비, 월세를 빼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매달 10만원씩 청약저축을 붓고, 여유 돈이 생기면 저축을 했다. 동전은 돼지저금통으로 직행.
몇 년 전 친구의 권유로 이곳에 온 후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금방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한, 두 달만 바짝 돈을 벌자는 심사였다. 그렇게 공부할 돈을 모은 후 시험에 전념하자고 생각했다.
대출을 받고, 가족과 지인에게 돈을 빌려 쏟아 부었다. 그래도 통장에 들어온 돈은 한 달에 십만 원. 6개월, 1년, 3년…. 시간이 지날수록 벌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되레 빚만 잔뜩 늘어났다. 결국 A는 시험을 포기했다.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 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집도 없이 사무실의 남는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돈을 내어주지 않는 가족과는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과정은 쓰지만 결과는 달다 이거에요. 그쪽도 몇 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서….”
사실 A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시험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돈 때문이란 것을.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 쳐도 당락을 알 수 없는 희박한 싸움. 그래도 먹고사니즘은 해결되지 않았다. 제로섬 게임과 같은 시험공부조차 경제적 지원을 받느냐에 따라 게임의 승률이 달라졌다. A는 답답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빈곤이 만들어낸 암담함은 그를 다단계 회사로 이끌었다. 훗날 한 번 더 그곳을 찾아갔지만, A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나는 만약 A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졌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랬다면 그녀는 다단계 회사에서 거액의 빚을 지지도, 시험공부를 포기하지 않아도, 그토록 암담한 상황까지 이르진 않았을지 모른다.
B씨는 대학졸업 후 쭉 서울 아현동에서 살았다. 거기서 몇 년, 다시 서울 대학동 일대 소위 ‘고시촌’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주했다. 아현동은 재개발 전만 해도 저렴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면 살만한 방이 꽤 있었다. 물론 시설은 낙후되어 있지만, 인접한 신촌, 이대가 있어서 교통도 편했다. 그렇지만 재개발 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자 B는 타의로 더 싼 방을 찾아야만 했다. 고시촌에 온 이후 그는 사정이 급격이 나빠졌다. 회사를 다니면서 모아둔 돈은 사법고시 준비에, 생활비에, 책값으로 다 써버린지 오래였다.
기댈 곳은 고향에 있던 노모뿐이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는 애당초 넉넉한 용돈을 받을 수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돈과 시험 준비는 해야 했다. 고시촌에서도 더 싼 방으로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렇게 언덕 위에 있는 ‘잠방’까지 가게된 것이다. 그 곳은 보증금이 없고, 월세는 10만원이었다.
외출 후 돌아와 전등을 켜면 흩어지는 바퀴벌레, 방에 화장실이 없어 아침마다 벌어지는 공용 화장실 자리싸움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다만, 궁핍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노모와 누이에게 용돈을 부탁할 때마다 B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사서는 산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바라봤다.
한번은 지하철을 놓쳐 택시를 타야 했다. 요금은 2만5000원이 나왔다. 주머니에는 10000원밖에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3만원을 보내주겠다며 사정해 겨우 집에 올 수 있었지만, 약속은 차일피일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성난 기사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B는 비참함을 느꼈다. 결국 택시기사는 그를 경찰서에 고발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적당히 합의하라는 경찰의 권유에 B는 누이에게 빌린 30만원을 주고 합의를 했다.
급한 불을 끄자 그 다음은 생활의 압박이 왔다. 다시 노모와 누이에게 손을 벌릴 염치가 그에게는 없었다. 1500원짜리 칼국수 한 그릇이 박씨의 하루 끼니였다. 곧 수중에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주머니를 털자 남은 돈은 1000원. 그는 1000원을 주고 건빵 3봉지를 샀다. 건빵을 으깨 가루를 내 물에 섞어 마시면서 일주일을 버텼다.
그러던 참에 사법고시가 폐지된다는 소문이 현실이 됐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마지막 희망. 인생을 리셋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은 그렇게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공사장 일용직 자릴 얻으러 가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사회 자산불평등 문제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위 20%인 소득 1분위와 상위 20%인 5분위 사이의 자산격차는 감소 추세지만 절대차액은 증가하는 추세다. 1분위와 5분위 격차의 절대금액은 지난 2012년 6억6000여만 원에서 2018년 7억7000여만 원으로 늘었다. 2019년 조사에는 절대금액이 8억 2000여만 원까지 증가했다. 통계는 개인의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통계가 답해주지 않는 것도 있다.
A, B와 같은 처지의 청년들은
소득 하위 20%에도 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지난해 9월 ‘복지 위기가구 발굴 대책 보완조치’를 발표했다. 취지는 좋다. 복지 위기가구 찾고, 돌보고, 지원하는 체계 강화한다는 것. 그러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긴급복지지원법, 사회보장급여법 등 관련법의 적용 대상에서 앞선 청년들은 빠져 있었다. ‘위기가구’란 정의도 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위기가구 실태조사에서 거주 등록이 되어 있지 않거나 장애 등이 있지 않은 청년층은 모니터링에서 빠지거나 제외되기 때문이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주위에 힘들어 하는 이웃들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봐주시고, 안타까운 죽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함께 부탁드린다.”
정부 당국자의 조언조차 그들에겐 먼 이야기였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고달픈 청춘의 상당수는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고립된 삶을 산다. 지옥고라 불리는 월세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에서 거주하는 가난한 청춘의 주변에는 이웃이라 할 만한 이들이 많지 않다. 신 위기세대, 신 위기가구. 그들은 우리사회의 투명인간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토닥여줄 어른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