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기사를 쓰기 위해 지역의 반도체 공정 협력업체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여러 이유로 기사는 쓰지 못했지만 당시의 기억은 아직 남아있다. 브런치 <김양균의 현장보고>의 서른번째 글로 그 기억의 한 조각을 꺼내어 놓는다.
그날 저녁 나는 A와 국밥에 소주를 나눠 마셨다. 그릇이 비워질 무렵 녀석이 큰소릴 쳤다. 오늘 술값은 자기가 쏘겠다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안에 있던 시퍼런 지폐 두 장을 주인에게 내밀었다. 봉투가 얇아졌다. 연거푸 털어넣은 소주에 취기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봉투가 다시 부풀어 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우린 방진복을 입고 일했다. 처음에는 꼭 우주복 같았다. 일을 하다보면 통풍이 되지 않아 땀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진이 빠져 보통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소주는 따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가져다줬다. 찬 소주를 들이키는 것으로 우린 하루를 마감했다.
주급이나 월급으로 돈을 받았다. 가끔 잔업을 마치면 현금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소주를 나눠 마신날도 그랬다. 일은 쉽게 구할 수 있다. 집이 공장과 가까워서 ‘땜방’을 해야 할 때마다 전화가 왔다. 사실 난 글을 쓰려고 일을 했지만 결국 쓰진 못했다. 등록금을 벌려고, 혹은 생계를 위해 방진복을 입는 이들의 진한 심정을, 글로 잘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기만 혹은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 신문사도 내 위장취업 기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약직도 아니었다. 일용직이었다. 한번 쓰면 끝나는,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력이었다. 그렇지만 일용직이라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아르바이트로 온 여학생을 짝사랑하던 A의 수줍은 고백은 찬 거절로 돌아왔다. 함께 소주를 마시던 날 A가 말했다.
“저처럼 빌빌거리는 놈, 제가 여자라도 싫을걸요.”
난 대답대신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서 다음에는 회 먹으러 가자고. 나도 웃고, A도 웃었다. 서글픈 웃음이었다.
이후에도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룬 기사 접할 때마다 난 A를 떠올렸다. 종종 관련 기사를 쓰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나의 글은 여전히 기만적이었다. 한번은 계약직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자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내심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기자가 모두의 경험을 하고 글을 쓸 수는 없지만, 정책과 통계로 나타난 숫자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 고독이 배여 있던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었는지가 궁금했지만, 끝내 묻진 않았다. 그날 맛깔스런 회를 맛보았다.
나는 반도체 세척 알바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 더울 때는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는 따스한 곳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짐짓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인냥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다. 땀이 눈에 들어가 따갑지만 닦을 수 없는 방진복의 후덥지근함 따윈 잊어버렸다.
문득 오늘 아침 오랜만에 A가 생각났다. 그날 소주 값은 내가 냈어야 했다. 그렇게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