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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Jun 20. 2023

야구를 보러 광주에 가다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5

2023년 6월 17일(토)


뜻밖의 휴방이 발단이었다. 자리를 비운 다른 기자를 대신해 땜빵 방송을 했던 지난 16일 오후, 갑작스레 <뉴스브런치> 단톡방이 울려왔다.


'돌아오는 월요일은 국회 교섭 단체 대표 연설이 나가게 되어  저희 방송은 안 나가게 되었어요.'


오? 오!!!!!!!


나는 속으로(아니 겉으로도) 쾌재를 불렀다. 비록 방송이 있는 월, 목에만 일하는 처지지만 그 뜻밖의 휴가가 갖는 가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주일을 적당하게 분절한 월, 목의 방송일 때문에 나는 도통 어디 여행을 가기가 애매했기 때문에. 물론 미리 얘기를 하면 해당 일에는 다른 기자에게 방송을 넘기고 놀러갈 수도 있으련만 또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하고서 가고 싶은 여행지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제법 참는 편을 택했었다.


그러나, 알아서 휴방이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바로 티켓링크에 들어가 광주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리는 NC vs 기아의 주말 2연전에 원정 응원석 쪽 남은 자리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평소라면 월요일 오전 방송에 맞춰 일요일이 하루종일 바쁜데, 월요일 방송이 휴방됐으니 오롯이 내 몫인 주말에 1박 2일로 갔다와도 될 것이었다. 금요일 땜빵 방송을 맡기 전 부터, 갈까말까를 고민하던 여행이기에 모든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챔피언스필드는 신기하게 1루가 원정석, 3루가 홈 응원석이었는데 1루쪽 자리가 9석 정도 남아 있었다. 광클을 하며, 친구 Y에게 톡을 날렸다. '나 주말에 광주 가서 야구 볼까 싶은데, 니 생각 있나.'


최근 내가 야구 전도에 성공한 Y와는 원래, 토요일에 함께 우리집에서 와인 한 잔 하며 야구를 볼 참이었다. 나의 돌연한 제안에 Y는 '가고 싶은데 나는 한 경기 밖에 못 볼 거 같아서 ㅠㅠ'라고 했다. 그렇게 갑작스런 여행 제안에 주말에도 바쁜 직장인이 응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해했고, 먼저 한 와인 약속을 깬 건 나이기에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기장에서 늘 혼자여도 좋으니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숙소와 교통편 예약까지 마치고 와인 한 병을 따서 야구를 기다렸다. 주말까지 이어질 NC  vs 기아 경기의 1차전.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Y와 실시간으로 카톡을 해가며 경기를 시청했다. 이날의 경기는 최근 컨디션이 좋던 '토종 에이스' 이재학이 선발이었는데 1회부터 4점을 두들겨 맞았다. 불금에 알콜기가 확 올라오며 Y와의 채팅창은 불타 올랐다. (경남 통영 출신의 Y도 나와 같은 NC팬이다.) 경기 시작 1시간쯤 됐을까, Y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아 나도 한 경기라도 볼까' 그 날의 경기가 난타전 끝 11:13로 끝났고, 각자의 집에서 불콰하게 취한 나와 Y는 결국 "가자 광주로!"를 외치게 됐다. 나는 취한 정신에도 원래 예매했던 자리를 취소하고, 두 자리 연석을 급히 구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오전 11시 5분, 나와 Y는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 상황이 배꼽빠지게 웃겼다. 야구를 보겠다고 잠실, 고척, 창원에 이어 광주까지 가고 있는 내 자신에 2주 전까지는 야구에 도통 관심이 없다가 직관 한 방에 '야빠'가 된 Y와의 여행이 실감이 안 났기 때문이다. 대학 때부터 16년을 알고 지낸 이래 도통 취미가 겹친 적이 없는 사이었는데, 순식간에 야구로 대동단결한 모습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광주로 내려가는 내내 어제 본 야구 얘기와 NC 선수들 얘기를 조잘조잘 지치지도 않고 나눴다.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냥, 나랑 같이 일요일 경기도 보고 가~"

"그...그럴까?"


광주로 내려 가는 내내 나는 또 일요일 경기 연석 자리를 찾아 헤맸고, 결국 예매에 성공했다.


광주는 처음이라는 Y와, 3시간 30분 만에 광주에 도착했다. 나는 세 번째 방문이었다. 2017년 나주에 살던 친한 언니를 만나러, 2018년 광주비엔날레 때 미술 기자로서 출장을 왔었다. 비엔날레 등 볼거리가 많고 먹을 게 맛있었던 기억이 살풋 났다. 버스터미널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Y는 오랜 경기에도 지치지 않을 핸드폰을 위한 보조 배터리와, 혹시나 모를 선수들 사인을 받기 위해 은색 마카를 샀다. 나는? 올해만 직관 6회를 거친 나는 이미 다 준비돼 있었다.


시내 버스를 타고 광주챔피언스필드로 갔다. 선수들 출근길을 지켜보자고 결의했기 때문에, 지체없이 야구장으로 향했다. 챔필이 타 구장에 비해 비교적 선수들 출퇴근길에 접촉이 용이해 사인 받기 쉽다고 네이버 블로그의 많은 후기들이 알려줬기 때문이다. 원정 선수들 출근길은 보통 경기 시작 3시간 전이래서, 마음이 급했다. 그 날 경기는 오후 5시에 시작이고, 그때 시간이 3시쯤 됐기 때문에.



야구장에 도착했더니, 정문쪽 주차장 근처에 펜스를 둘러싸고 이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개중 한쪽 구석에 우리도 섰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손아섭, 이용찬 유니폼을 들고, 미리 준비하지 못한 Y는 자기 모자를 들고. 10분쯤 기다렸을까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등장했다. 총 세 대. 신기하게 우리 바로 앞에 2호차 버스의 출입구가 섰다. 거기서 화면으로는 너무 봐서 내적 친밀감이 오지는 손아섭 선수가 내렸다. 손아섭 유니폼을 이름이 보이게 들고서 냅다 "손아섭 선수님 싸인해주세요!" 했다. 그는 "경기 준비 해야 돼서"라고 했지만 내가 건넨 마카를 쥐었고, 내 유니폼이자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에 슥슥 획을 그었다. 그리고 나의 왼쪽에 있던 Y 대신 오른쪽에 있는 다른 팬의 야구공을 쥐길래, 다급해진 내가 Y의 모자와 마카를 쥐고 그에게 내밀었다. "선수님 보러 서울에서 왔어요!" 그가 아주 살짝 움찔하더니 Y의 모자에 또 슥슥 획을 그었다.


Y가 환호했고, 나도 환호했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래 선수들 덕질(그 때는 농구를 좋아했다)을 하기도 했고, 기자가 되어서는 문화부 기자를 하며 영화배우들이나 고 이어령 선생님과 백기완 선생님께도 셀카를 찍어달라고 곧잘 들이댔던 나로선 제법 그런 걸 요청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첫째,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정확히 호명한다. "XXX 선수님 사인해주세요!" 둘째, 이것만으로 여의치 않을 때는 약간의 마음의 부담을 준다. 이번처럼 "서울에서 왔어요"라거나, 고딩 때는 옆에 있는 친구를 가리키며 "얘 오빠 대학 후배예요" 하는 식으로. (대학 입학 직전이었던 당시 친구는 정시로 두 군데 대학에 합격했고, 그 중 하나가 동국대였다. 내가 들이댔던 해당 선수는 동국대 출신의 김승현이었다. 친구는 결국 입학은 다른 곳으로 했다.)


경기 전에 실례였나... 싶으면서도 '화수목금토일 경기를 하는데 뭐' 하는 자기 위안을 마치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국적으로 폭염특보가 내려, 햇빛을 피할 길 없는 야구장. 이날 광주는 '햇빛이 쨍쨍' 정도는 아니었지만 습기가 어마어마해서 사람들까지 들어차자 흡사 '편백나무 찜기'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우삼겹이나 차돌박이도 아닌데 여기 앉아 있어야 하나' 싶은 수준의 온도와 습기였다.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필드 위의 선수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노는 양을 지켜보는데 Y가 연신 "유튜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 부쩍 타격감이 올라온 제이슨 마틴 선수가 코앞에 보이길래 "마틴 화이팅"을 외쳤다. 마틴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수줍은 듯 손을 흔들었다.


야구도 좋지만 뭘 좀 먹어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버스에서 김밥 한 줄씩 먹은 게 끝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다닐 때는 야구장에서 헤비한 걸 먹는 걸 선호하지 않는데, 친구가 있으니 맘껏 플렉스 해 볼 때다. 교촌에서 허니순살 한 마리와 생맥 두 잔을 사서 자리에 앉았다.



5시부터 경기 시작. 이날 선발 투수는 NC 와이드너, 기아는 윤영철. 둘다 직관에서 피칭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1승 1패를 기록한 와이드너는 기복이 걱정이 됐다. 윤영철은 '최강야구'로 익숙한 투수여서 기대가 됐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윤영철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경기였다. 3회, NC가 7점을 뽑아내며 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경기 전에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에게 사인을 해준 손아섭 '오빠'에게 다소간 마음의 빚이 있었는데 이날 오빠는 3회 선두 타자로 나와 3루타를 쳤다. NC 여러 선수들의 등장곡 가운데서도 기타 사운드가 현란한 손아섭의 '오빠라고 불러다오'가 젤 흥겹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정말 그 사운드에 맞춰 헤드뱅잉을 할 맛이 났다. 통산 타율 2-4-3위에 빛나는 NC의 1-2-3번 타순(손아섭-박민우-박건우)은 정말 신이가 난다. 가지고 간 응원 방망이를 딱딱 마주쳐 가며, 이젠 거의 다 외우다시피한 선수별 응원가들을 소리 높여 불렀다.


이날 1루 원정석은, 사실 원정 응원석이라 하기 어려울 만치 레드 유니폼을 입은 기아팬들이 많았다. 서울에서야 나같이 고향팀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제법 있을 테지만, 광주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NC의 응원단인 랠리 다이노스 바로 앞 좌석은 하루종일 서서 응원해야할 게 부담이라, 것보다는 보다 홈플레이트에 가까운 자리를 잡았는데 그랬더니 NC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없어서 굉장한 소외감을 느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NC 경기를 보러 경남 김해에서 왔다는 내 오른쪽에 앉은 세 가족이었다.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로 구성된 그 가족은 우리와 함께 적진 한복판에서 "창~원 NC!"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보통은 가까운 창원과 부산, 대구로 가고 광주는 처음이라는 가족이었다. 내 옆에 앉은 아내분은, 자신이 파악한 선수별 성향과 '창원 NC파크에서 선수들 사인 받는 법'을 다소간 전수해줬다. "(김)주원이랑 (이)용준이는 엔팍에서 도보 거리에 살아요. 그래서 출퇴근길에 걸어서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그 때 받아도 되고요. 차 타는 다른 선수들은 선수들 주차장 근처에서. 그리고 1루쪽 익사이팅존이나 미니테이블석 쪽에 보면 사람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 있는데, 박건우는 거기로 막 들어와서 커피 나눠주고 그래요." 아까 손아섭에 사인 받았다고 자랑했더니 그 분이 그랬다. "손아섭은 경기 전에는 잘 안해주던데" Y와 나는 더욱 환호했다.

 

3회가 빅이닝이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이것이 직관의 기쁨이로구나'하며 흐물거리고 있는 새 7회, 기아에서 이창진의 3점홈런이 터져나왔다. 기아는 10:7까지 따라붙었다. 전날 경기에서 백투백 홈런까지 터져나왔던 기아의 홈런 세례가 떠오르며 온몸이 쭈뼛해졌다. 게다가 기아의 응원가들은 굉장히 웅장한 구석이 있어 듣는 사람을 쫄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특히나 그 유명한 시옷 댄스의 "타이거즈~ 소크라테스~"는 전주부터가 출정가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반면, 몇몇 기아팬들 중에서는 "NC 응원가가 힙하다"면서 "우리도 저런 것 좀 하지"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4번 타자 마틴의 등장곡인 닥터 드레의 노래에 맞춰 힙합 콘서트 마냥 팔을 흔들 때 그런 얘기가 많이 들렸던 거 같다. 내가 들어도 확실히 프로야구 원년과 함께 태동한 구단이라 그런지 기아는 응원가가 전 연령을 포괄하는 느낌의 것들이 많았다. 2011년에 창단한 NC는 아무래도 신식(?) 리듬의 응원가를 자랑한다.


광주에서 외치는 "쎄리라"는 잠실이나 고척, 창원에서 외치는 "쎄리라" 하고는 다른 느낌이었다. 잠실, 고척에서는 해방감 그 잡채였고 창원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광주에서는 기어코 큰 목소리로 외쳐야겠다고 악다구니를 쓰게 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같이 "쎄리라"를 외치는 이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그랬다. 그러나 수적으로 서울보다도 절대 열세인 광주에서는 "우리는 '때려라'를 이렇게 말한다"는 걸 기를 쓰고 알리고픈 마음이 더 컸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기아팬들은 그 때마다 갸우뚱했다. "뭐래? 쎄.. 쎄려?"


응원의 백미는, 투수가 견제할 때 공격하는 팀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라고 생각한다. NC는 딱 한 글자, "쫌!"이다. 기아는 그것보다 훨씬 말이 길었는데 처음에는 청해가 잘 안 됐다. 세 번쯤 들으니 알 수 있었던 그 말은 이것이었다. "아야~ 아야~ 날 새겄다~" 각자가 경상도스럽고 전라도스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8회 말, NC의 클로저 이용찬이 나왔다. 9회가 아닌 8회, 조금 이른 등판이었지만 전날 지기도 했고, 기아가 야금야금 추격을 거듭하고 있어 조기 등판한 것이다. 저 멀리, 불펜에서 걸어나오는 실루엣만 보고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초구부터 착착 시원스럽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앞선 투수들에서 직전까지 자꾸 카운트가 몰리는 것만 보다가 안정적인 경기 운용을 보니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것은 흡사 '무심(無心)'의 투구였다. 지난 14일 두산전에서 세이브를 거두고 난 후 "타이트한 상황에 등판해서 부담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항상 제가 나가는 상황이 타이트한 상황이기 때문에 특별한 부담은 없었고, '최대한 잘 막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했던 거 같습니다." 임경선은 소설 <호텔 이야기> 속 단편 <호텔에서 한 달 살기>에서 지속가능한 창작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심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에 적당히 초연한 것.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다소 식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지키는 것.' 아…


문제의 'WBC 술판 사태'가 터지고, 징계위가 열려 제재금 300만원과 사회봉사 40시간이라는 처분을 받은 후 보는 처음 직관으로 보는 그의 등판이었다. 그 사태로 적잖이 실망했기 때문에, 다시 그를 마운드에서 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두산을 상대로 한 복귀전에서 삼진 2개를 잡아내는 걸 보고 그가 없는 새 내가 얼마나 그를 기다렸는지 또 새삼 깨달았다. 그날 구단 유튜브 댓글에는 '술 먹을 수 있지 그게 뭐라고'가 달렸다. 그 말 그대로 '흐린 눈'을 하고 싶어졌다...


이용찬의 등판과 함께 경기는 그대로 10:7 스코어로 마무리됐다. 그가 스트라이크를 잡을 때마다 Y와 포효하는 재미가 어마어마했다.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쳐나왔고, 경기장에서 나올 때쯤에는 목이 쉬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내가 아무리 구두로 "이용찬 멋있다"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던 Y도, 육안으로 그의 피칭을 보고서는 100% 이해한다고 했다. 야심차게 구매한 치킨은, 네 조각도 먹지 못할 만큼 우리는 허기를 잊었다.


경기가 끝나고서는 또 퇴근길을 보기 위해 냅다 뛰었다. 앞서 낮에 겪은 출근길로 말미암아, 나름의 경험치가 누적됐기에 자신있었다. 2호는 야수차, 3호는 투수차. Y와 나는 낮에 보지 못한 이용찬을 보기 위해 투수차 입구 앞에 섰다. 20여분 기다린 끝에 그가 나왔지만, 사인은 못 받았다. 그가 오른팔에 둘둘 랩핑을(아이싱이라 부르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펜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조민석 선수와 셀카를 찍었다. 셀카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마운드에선 그렇게 든든해 뵀던 그가 실제는 얼마나 젊은 청년인가 싶었다.


버스를 모두 보내고, 우리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숙소인 C호텔은 챔필 반대편인 상무지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체크인을 하니 밤 10시 30분이 넘어 있었다. 남은 치킨은 모두 버렸건만,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배가 고팠다. 배달 어플을 뒤져 광주의 명물 상추튀김과 떡볶이를 시켰다. 우걱우걱 먹으며 오늘의 일들을 복기했다.


 Y는 "한일전을 뛰어넘는 긴장감"이라고 평했다. 빨간 것(기아 유니폼 색)들은 죄다 싫어질 수준이었다고. 나는 한일전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최근 야구장에서 느끼는 적개심의 실체가 당혹스럽기는 했다. 우리는 전날 1차전서부터 카톡 중계를 하면서 게이지를 높여왔는데, 유독 야구를 볼 때만 입이 걸었다. 서로 평소에 갖고 있던 편견도 여지없이 노출하며, 소리를 빽빽 지르고 상욕을 해가며 야구를 봤다. Y는 말했다. "오늘처럼 야구는 한참 이기다가도 홈런 한 방에 뒤집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정말 지독한 감정의 롤코였다. 심리검사에서 '매우 이성적이라 감정 컨트롤에 어려움을 겪음'이라는 진단을 받은 나같은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좀 지칠 정도였다. 이렇게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매일, 정규시즌만도 144경기를 어떻게 버티지? 그건 너무 피곤한걸.


상추튀김은 맛났다. 튀김옷이 독특한 오징어튀김을 양파와 청양고추가 가득 들어간 간장 베이스의 양념장에 찍어 상추를 싸먹는데 상추 덕인지 개운해서 좋았다. 떡볶이 양념은 멸치 다시를 낸 듯 구수한 게 매력이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오늘 본 선수들 얘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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