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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Jul 05. 2023

야빠에게 두 개의 사랑은 가능한가

야구라는 기쁨과 고통 7: 수원행

2023년 6월 30일 금요일


팬들이 선수들을 기다리는 흔한 장면. NC 선수들의 위팍 출근길이다.


차 없는 경기도민은 자기 동네를 제외한 다른 경기도 지역과 멀어진다. 경기도에서 경기도를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KTX가 뚫린 다른 지역에 가기보다 더 힘들기 때문이다. 산 넘고 물 건너 여러번 환승을 해야 하는데, 그나마도 광역버스는 30분에 한 대 오는 것들도 많다. 네이버 지도는 쿨하게 '1시간 30분'을 외쳐도 실제 경험해보면 2시간 넘게 걸리는 여정이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뚜벅이 고양시민으로서 수원행은, 그래서 좀 저어되는 면이 있었다. 수원은 내가 서울에 살면서는 틈틈이 들르던 곳이다. 특히나 화성행궁을 좋아했기에, 1호선을 타고 오랜 시간 달려 도착해 성곽길을 걷거나 화성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앉아 커피 마시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에서도 1호선 라인에 살 때의 일이고, 고양에서 가려니 네이버 지도가 여러 갈래로 길을 추천하는데 머리가 아득해졌다. 게다가 지하철을 타면 개중에 반 이상은 앉아서 가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행을 결행하게 된 것은, 그래도 내가 수원을 좋아한다는 것과 KT위즈파크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에 있어 '차애팀'은 존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차애'이자, 첫 정은 KT다. 지난해 겨울부터 <최강야구>를 통해 야구에 입문하면서, <최강야구> 선수들이 나오는 콘텐츠들은 무한 돌려봤다. 그 가운데 엠스플에서 하는 <스톡킹>이 있었고, 거기 심수창의 절친으로 삼성의 우규민, KT의 박경수가 나온 편을 봤다. 2021년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박경수의 몸을 날리는 호수비, '목발 MVP'의 탄생 등등을 눈여겨 봤다. 창단 첫 우승을 이끈 'KT 박경수'의 아우라가 위즈파크의 주소인 '경수대로'에까지 미치는 것만 같다. (둘의 별 상관관계는 없다고 한다.) 그 뒤로 지금도 나는 심심하면 박경수 호수비 모음을 유튜브에서 돌려본다. 내 고향 팀 NC의 존재가 나에게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꾸준히 KT를 팔로우했었다.


아무튼 그런고로 '광주도 다녀왔는데 물리적 거리는 수원이 훨씬 가깝잖아' 하며 오전 9시 30분부터 수원으로 향했다. 최근 퇴사해 나의 야구 여정에 본격 합류한 Y와는 화성행궁에서 11시에 만나기로 한 터였다. 그러나 가는 길부터 첩첩산중이었다. 우리 집에서 1000번 버스를 타고 출발해 신한은행 본점 앞에서 8800번으로 환승을 하고 경기대 후문서 내려 700-2 또는 60번 버스를 타야 한다. 일단은 8800번 버스의 배차 간격이 18분이었고, 타서도 막히는 구간이 꽤 길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수원은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화성행궁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었다. 먼저 도착한 Y에게 석고대죄를 했다. 습기가 있어 찌는 듯한 날씨였지만 햇빛이 세진 않았다. 아이스 라떼를 한 잔 씩 물고 화성행궁 탐방에 나섰다.


화성행궁의 입구.


경복궁에 익숙한 처지로, 화성행궁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경복궁의 미니 미니 미니 버전쯤 될까.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쉬어간 곳,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전각 하나 하나를 건넌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비극을 안고 자란 정조는 얼마나 극기하던 인물이었을까. Y와 이 얘기 저 얘기하며 행궁을 휘릭 돌아봤다.


점심 때가 되어 밥을 먹으러 갔다. 화성행궁 근처는 서울의 북촌 마냥 기프트샵도 많고, 운치 있는 카페나 식당들도 많아 두런두런 걸으며 구경하기 좋다. 미리 검색해온 곳은 '뜸'이라는 솥밥 전문점이다. 어려서는 파스타나 햄버거 같은 것을 찾아다니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무조건 맛난 밥을 주는 곳, 반찬을 구븨구븨 펴서 주는 곳으로 입맛이 변했다. 사람이 적었던 다른 식당과 달리 이곳만 거의 좌석이 꽉 차 있었는데, 운 좋게 남은 한 자리를 얻었다. 바질 새우 솥밥 두 개를 시켰다. 


바질 새우 솥밥에는 새우와 미나리, 바질이 넉넉하게 올려져 있고 버터 한 조각이 풍미를 돋웠다. 간장 베이스로 보이는 양념장을 한 바퀴 휙 두르면 딱 간이 맞았다. 바질페스토도 들어간 듯 전반적으로 맛이 '바질바질'해서 솥밥이라고 한식이라기 보다는, 양식 같은 느낌도 많이 난다. 고소한 맛에 오래도록 저작운동을 해가며 먹었다. 가끔 오징어젓갈을 얹어서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바질솥밥의 비주얼.


배가 불러서는 본격적으로 행궁길 쇼핑에 나섰다. 책방(브로콜리숲)도 둘러보고 기프트샵이나 소품샵 등등도 둘렀다. 나는 여행지에 가서 손이 커지는 습성이 있는데, 심지어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공산품도 굳이 여행지에 가서 산다. 이날은 일본의 '게다'(나막신)를 닮은 슬리퍼에 빠져서 살까 말까를 고민하다 온라인에선 만원 싸게 파는 걸 보고 겨우 내려놨다. 이어서는 신발과 악세사리, 가방 등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가 갑자기 미니백에 꽂혀버렸다. 청록색의, 여름에 딱 들기 좋을 토트 겸 크로스백이었는데 크기도 넉넉해서 보부상인 나에게 딱일 거 같았다. Y도 같은 가방에 꽂혀 우리는 눈이 빙그르르 돌았다. 좀처럼 취향이 겹치지 않는 우리였는데, 요즘 야구팀과 야구선수를 넘어 패션 취향까지 겹치고 있었다. 결국 재고 현황까지 물어 똑같은 색깔의 가방 두 개를 각자 하나씩 들고 나왔다. 인조 가죽에 가격은 4만 9000원. 서로의 존재가 아니었음 지름까지는 가지 않았으리라 예측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식후 커피 한 잔이 땡겨서, 성곽길 뷰를 자랑하는 정지영커피로스터스 장안문점에 자리 잡았다. 이 카페는 내가 수원에 올 때마다 찾는 곳이다. 정지영커피로스터스는 수원 지역의 대표 프랜차이즈다. 특히나 장안문점은 옛날 양옥집을 개조한 구조가 힙하고, 성곽뷰를 어슴푸레 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항상 먹던 라떼 대신 여기 시그니처라는 코코넛 음료를 시켰다. 시원하면서도 코코넛 향이 나서 이국적인데다가 달짝지근한 음료를 성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쪽쪽 빨아 마셨다.


위즈파크는 여기서 도보로도 30분 남짓. 가까운 곳이다. 버스로는 10분 컷이길래, 버스를 타기로 했다. 장안문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장안문 사이로 보이는 도시뷰가,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나 보던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거길 지나며, '시간여행자' 같은 기분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위팍 정류장에서 내리니 야구공 실밥을 재현한 벤치가 눈에 띄었다. 아, 어디서 나는 것만 같은 야구장 냄새. 세로로 길게 서 있는 KT 선수들의 사진을 지나쳐 유유히 3루 근방에 있다는 원정 게이트를 향해 걸어 갔다.


위팍에서 원정 출근길을 챙기는 방법, 3루 게이트 직전에 있는 원정 게이트 앞 양옆에 도열해 선다. 그쪽으로 원정 선수들이 탄 버스가 오기 때문이다. 혹은 버스 앞쪽으로 바투 붙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보다는 여기가 그늘이기도 하고 선수들이 더 오래 머무는 곳이기도 해서 나을 거 같다. 오후 4시쯤 됐을 때 NC 버스들이 잇따라 서며 1호차에 탄 코칭스태프부터 하나둘 내렸다. 코칭스태프들 가운데서는 주로 강인권 감독에게 사인 요청이 몰렸고, 강 감독은 일일이 다 응해줬다. 


이어 2호차, 3호차에 탄 야수와 투수들이 줄줄이 내렸다. 앞서 성큼성큼 걷는 이가 이용찬이었는데, 그를 멈춰 세워 Y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다른 팬들과 찍은 사진을 봐도 이용찬은 거의가 표정 변화가 없는데 우리 사진에도 똑 그렇게 찍혀서 나의 웃음벨이 되었다. 이어 손아섭이 올 때 Y가 미리 챙겨온 야구공에 사인을 부탁했고, 나는 그에게 "선수님, 잘생겼어요" 했다. 그가 슬쩍 웃었다. 



뙤약볕을 피하기 위해 잠시 위팍 앞 스타벅스로 이동했다가, 피지오 한 잔 마시고 5시 30분쯤 위팍으로 컴백했다. KT 팀스토어에 들리기 위함이었다. 잠실의 유니크 스포츠 마냥 줄 서서 들어가는 정도는 아니었고, 내부에도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KT는 팀 컬러인 블랙에 화이트, 레드를 적당히 섞어 굿즈와 유니폼을 만드는 것 같았는데 NC에 비해서는 비교적 거의 모든 물품들이 저렴한 축이었다. (응원봉 제외) KT 마크가 새겨진 버건디색 피케셔츠가 3만원 후반대에 팔길래 오래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3루 응원지정석으로 드디어 입장. 119구역에 자리 잡았다. 들어가자마자 받은 인상은 '아, 작다'였다. 지금까지 다녀온 어떤 야구장(잠실, 고척, 마산, 광주)보다도 아담하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라운드 넓이가 잠실, 대전, 광주, 대구, 고척보다는 짧고, 마산 문학보다는 크단다. 내 눈대중으로는 마산보다도 작은 느낌이었지만, 아마 직전에 내가 다녀온 곳이 잠실이었기에 더욱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119구역 3열 좌석은 앞에 있는 펜스에 시야가 가리지도 않고 마운드나 홈플레이트 쪽에 바투 붙어서 투수의 피칭에 집중한다거나, 타자들 움직임을 자세히 보기 좋았다. 역시나 더웠고, 이제는 오랜 야구장 나들이로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우리는 바로 준비해온 양산을 꺼내들었다.


자리마다 음식 주문이 가능한 QR코드가 있길래 그걸로 수원의 명물 진미통닭을 시켰다. 자리까지 가져다 주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선주문 시스템이다. 음식 준비가 다 되면 문자가 오고, 그걸 가지러 매장으로 간다. 주문과 동시에 '음식 준비 완료' 문자가 떠서, 매장에 가서 주문번호를 보여주고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를 받아왔다. 사실 그간 야구장에서 먹는 프랜차이즈 치킨들 퀄리티가 너무 구려서 실망하고 있었는데, 진미통닭은 달랐다. 집에서 튀긴 듯한 치킨에 환장하는 입맛이 돼서 그런진 몰라도, 순정한 튀김옷에 냄새 안나는 깔끔한 닭이 주는 풍미가 좋았다. 심지어 닭똥집 튀김까지 같이 있어서 만족도가 높았다. 치킨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Y도 두 손 걷어붙여가며 열심히 먹었다. 맥주가 땡겼지만 요즘 음주 빈도가 높았으므로 자제했다. 위팍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물은 보영만두의 군만주+쫄면 조합인데, 진미통닭의 양이 차고 넘쳐서 그건 포기했다.



오후 6시 30분에 맞춰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다섯 군데 야구장을 돌아다녀봤지만 여성의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아, 잠실에서 두산 홈경기때는 선수들을 호명하는 분이 여성이긴 했다.) 고음에 까랑까랑한데다가 비장미가 있어서, 소싯적 프라이드FC에서 R 발음에 혀를 무한대로 굴려가며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Rrrrr~~" 하던 여성 장내 아나운서가 떠올랐다.


위팍의 박수미 아나운서는 KBO 리그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성 장내 아나운서란다. 그는 남녀 프로농구와 실업 핸드볼 장내 아나운서도 겸한다. 프로야구의 모든 것들이 '남성 디폴트'인데(선수나 코칭스태프 포함 응원단장과 장내 아나운서, 캐스터와 해설위원까지도) 위팍에서 처음 만난 여성 장내 아나운서의 존재가 너무 반가웠다. 기사를 찾아보니 박 아나운서도 처음엔 반감을 가진 팬들을 만났다고 한다. 여자 목소리가 '시끄럽다'는 것, 같은 실수를 해도 '여자라서 그래'라고 했다는 것이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디폴트'가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쉽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사소한 실수라도 하나 하면 "거 봐라 내가 뭐랬냐" 하는 식이다. 그것으로 곧 자기 말의 권위가 증명됐다는 듯 기세등등하다. 냉정하게, 프로야구판에서 여성이 디폴트인 것은 치어리더 밖에 없다. 그리고 금녀의 구역을 여성들이 하나하나 깨부수는 중이다. 역시나 개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자프로야구가 생기는 것이겠지만.


이날 경기엔 NC의 응원단인 '랠리 다이노스'가 와서, 경기 직전 앰프 점검을 하고 있었다. 직전 잠실 2연전에서(마지막 경기는 우천 취소 됐다) 응원단 없는 응원의 설움을 몸소 겪었던 우리로서는 랠리를 보는 즉시 어깨가 절로 들썩여졌다. 응원단이 없어도 원정석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레퍼토리로 응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타자들 등장곡의 리듬에서부터 둠칫거리며 시작되는 춤사위, 상대 투수의 주자 견제를 견제하는 응원인 '쫌'을 할 때 나오는 효과음, 역시나 응원이 직업인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들의 일사불란한 리드가 없이는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손아섭의 등장곡 '오빠라고 불러다오'의 기타 전주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려면 역시 앰프가, 스피커가 필요하다. 원정 NC 팬들의 오랜 바람은 대부분 주말 경기만 원정 파견을 가는 랠리 다이노스가 가까운 곳은 주중에라도, 사정이 된다면 모든 경기에 오는 것이다. 


NC의 경기 직전 구호, 아니 명언 타임. 주장 손아섭은 선수들에게 돌아가며 구호에 앞서 명언을 하나씩 준비해 오라고 했다.


이날 우리의 선발은 와이드너, KT는 쿠에바스로 '네 글자 외인 투수'들의 맞대결이었다. 와이드너는 기복이 심한 피칭 덕에 '와이드너 와 이라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투수 이미지가 강하다. NC 입단 첫 시즌인 올해 5월까지는 부상으로 매번 복귀 시점이 '미정'이었던지라 NC 팬들 사이에서는 '미정이' 이미지마저 덧씌워져 있다. KT에서 네 시즌을 뛰고, 2021년에는 창단 첫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가 팔꿈치 부상으로 떠났다 돌아온 쿠에바스의 피칭도 궁금하기는 했다. KT의 유튜브 채널에서 본 '돌아온 쿠에바스'의 미소가 너무도 맑아서, '이 선수가 진짜 KT를 좋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불안했던 와이드너가 살아나 6이닝 무실점으로 KT 타선을 꽁꽁 막고, 쿠에바스는 같은 이닝 동안 2실점을 하면서 선발 대결로는 와이드너가 이겼다. 3회초 NC 김주원의 2루타 - 안중열의 희생번트 - '오빠'의 안타로 이어진 선취점 획득이 짜릿했다. 특히나 안중열의 번트는, 번트를 지지리도 못 대기로 유명한 NC에서 나온 귀한 번트라 나는 더욱 힘차게 응원봉을 맞대서 박수를 쳤다. 야구장엘 가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나이지만 이날은 간만에 만난 '랠리'가 너무 반가워, 거의 올타임 기립 응원을 펼쳤다. 박건우의 희생플라이로 얻은 다음 점수까지 모든 게 '로드 투 윈'(Road to Win)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타석에 박경수가 나올 때만은, 마음이 요상해졌다. 타율 2할을 간신히 넘기는, 요즘은 스타팅 멤버로는 잘 나오지 않는, 서른 아홉의 백전 노장. 그런 박경수가 선발로 나왔고, 예의 그 큰 스윙으로 와이드너 공에 헛스윙을 할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부시럭거렸다. 와이드너가 와 이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야말로 와 이러나 싶은 포인트였다. 그런 마음을 Y에게 토로할 때마다, Y의 눈은(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세모 또는 네모가 됐다. 하지만 첫정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박경수가, 그날 기어이 일을 냈다. 7회말, 볼넷으로 KT 황재균이 출루한 뒤 와이드너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김시훈의 공을 박경수가 '따악' 때렸다. 맞자마자 '잘 맞았다' 싶은, 우익수 키를 넘기는 호쾌한 2루타였다. "아!" 그 때 별안간 터진 나의 함성은, 환호로 시작해서 탄식으로, '아' 하나에 여러 리듬을 담아 이어졌다. '그래, 내내 못하더라도 해야할 때 해주는 게 베테랑이지' 싶다가도 '아 뭔가 이게 KT가 추격하는데 발판이 되겠구나' 싶은 위험 신호 감지가 동시에 일어났다. 이 즈음 워낙 불펜 등판시 역전패가 많은 NC였고, 2점은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다. 


위즈파크는 전광판에도 수원화성이 그려져 있다.


이날은 박경수를 위시해 KT에서 비교적 얼굴이 익숙한 베테랑들이 일을 냈다. '왕년의 홈런왕' 박병호가 4타수 2안타 1타점을 올렸고, 박경수와 황재균은 각각 1안타 1타점으로 활약했다. 이들이 상대한 것은 NC의 젊은 불펜들인 김시훈-류진욱이었다. 김시훈, 류진욱은 NC의 불펜들 가운데서도 구위가 좋은 필승조들인데, 연이어 무너지는 모습에 마음이 시렸다. 특히나 류진욱은 지난 27일 두산전에서도 2실점을 하더니 이날도 0.2이닝 동안 2실점을 해, 결국 패전투수가 됐다. 이날 최종 스코어는 2-3 KT의 승. 플래카드에 적혀 있어 나를 킹받게 했던 글귀대로 이날 수원에 9회말은 없었고, NC의 클로저 이용찬도 등판하지 않았다.


이 날 나는 NC의 퇴근길을 지켰다. 사실 박경수에 사인을 받으려고 벼른 길이긴 했다. 그러나 박경수가 안타를 치고, NC가 이겼더라면 그랬을까. NC가 지자, KT 쪽으로는 영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박경수와 KT가 뇌리에서 멀어진 사이, 나의 심리적 공동체는 NC가 된 탓이었다. 나와 현재의 마음씀을 같이 하는 팀이 마음 아파하는데, 옛 사랑에게 달려가 희희낙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또 원정버스 전용 주차 구역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나오는 NC 선수들을 배웅했다. 팀의 최고참 박석민이 걸어나올 때 나는 "박석민 화이팅!"을 외쳤다. 이날 박석민은 파울 타구를 잡다 목 부상을 입었고, 다음 이닝 때 그 여파로 교체됐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오래 쉬다가 1군에 올라온 후, 영 예전 타격감을 못 찾는 그였는데 다시 또 부상이라니, 마음이 영 안타까웠다. 그가 버스 뒤쪽으로 들어가려다 돌아나와 내 쪽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손아섭을 비롯해 그날 부지런히 뛴 선수들 대부분은 일찍 버스로 들어갔고, 경기를 뛰지 않았던 하준영, 박민우 등의 선수들이 묵묵히 팬들이 내미는 굿즈들에 사인을 했다. 박민우가 내 옆에 있던 팬에게 사인을 할 때 내가 "걸그룹 댄스 춰주세요" 했더니 그가 '풉' 웃었다.(그는 2020년 우승 공약으로 '걸그룹 댄스'를 내걸었지만 아직까지 이행하지 않아 팬들 사이에 '박민우 걸그룹 댄스'는 밈으로 자리 잡았다.) 웃으라고 한 얘기에 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양 집까지 먼 길을 나섰다.


다시 봐도 KING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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