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인스타그램에서 지인들을 상대로 '보고 싶은 글' 투표를 했을 때 '퇴사썰'이 가장 많길래 쓴다. 적어도 나에게는 소용 있는 글로 남을 것이다.)
8개월 전 회사를 그만 둘 때 나의 마음 가짐은 '이직 말고 전직'이었다. '쓰기 싫은 글도 써야 하는 기자는 싫다, 이 긴긴 인생 기자만 하고 말 것이냐!'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충분히 시간과 품을 들여, 내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1년 정도는 나를 위해 투자함직 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레이더망에 포착된 직업이 출판 편집자였다. 인생 전반에 걸쳐 주구장창 소설책을 끼고 살았던 나는 실제 대학 4학년 때 모 출판사 문학 편집자직에 지원했다 서류에서 탈락한 적이 있다. 기자가 되고서는, 문화부에서 문학 기자로 2년 반을 일하며 편집자들을 가까이서 볼 일이 많았다. 그 어떤 기자보다도 편집자의 삶에 관심이 많은 기자였고, 틈만 나면 편집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노력했다.
옆에서 본 그들의 삶 - 기획, 섭외, 편집, 교정·교열 - 등은 나도 자신 있는 분야였다. 일간지에서 문학 기자로 일하면 외부 필자 원고를 기획하고 섭외할 일이 더러 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는 문학 기자를 '글 잘 쓰는 이를 잘 아는 이'로 알기 때문에 오피니언면 개편 때나 외부 필자를 필요로 하는 지면을 개편할 때 종종 코너 기획 - 섭외에 달하는 과정을 문학 기자에게 맡기곤 한다. 그 때마다 나는 글은 잘 쓰되 외부에 잘 안 알려진 직업인, 혹은 잘 알려진 문인이되 딴 데서는 쓴 적 없는 신박한 글감을 갖고 있는 이들을 추천하는 걸 재밌어했다. 내 의견이 채택이 되고, 그렇게 우리 지면을 통해 쌓인 원고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필자들을 보면 나혼자 적이 뿌듯해했다.
뿐만 아니라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 소위 '책 이야기'를 하는 게 나에겐 큰 기쁨이었다. 책의 만듦새에 대하여, 제목이 어떻고, 마케팅이 어떻고, 저자가 어떻고 하는 부분에 대하여. 내가 만약에 그 책의 편집자라면, 누굴 저자로 섭외했을까, 제목을 어떻게 뽑았을까, 목차는 어떻게 구성했을까, 띠지엔 무슨 문구를 넣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갈래로 돌려했다. 특히나 같은 저자라도, 출판사에 따라 혹은 편집자에 따라 다른 느낌의 책을 만드는 것을 눈여겨봤다. 나중에는, 편집국에 새로운 책이 오면 책 판권면부터 펼쳐 편집자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는 일도 왕왕 생겨났다.
퇴사 후, 내게 외주 편집 제안을 해온 출판사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기 전에 '체험'을 좀 해보고 싶었다.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 정도로 어떤 직업에 뛰어드는 일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기자일(!)을 하며 몸소 겪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쓴 책을 직접 편집해 독립출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친한 에세이스트인 K언니가 새 책을 자신이 만든 출판사에서 직접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가 직접 편집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책 제작 전반에 걸친 고민들을 알알이 보게 됐다.
한 번은 언니를 따라 파주에 있는 인쇄업체 견학을 다녀왔다. 엄청난 소음 속에 종이 뭉치들이 '서걱서걱' 썰리고, 프린팅을 마친 종이들이 분주하게 컨베이어 벨트 위를 도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니 책이 가진 물성이 절로 와닿았다. 실로 많은 노동자들이 '안전제일'과 '귀마개 착용'이라는 기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종이 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큰 책임감을 수반하는 일인지를 절감했다. 애초에 1차적으로 내용물을 쓰는 저자 뿐 아니라 책의 모든 결정 단계에 관여하는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이 많은 수고로움을 동반하는 작업을 시작하며, 몰책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쇄소를 한 바퀴 둘러본 후 현업 출판사 제작부에 있는 분과, 인쇄소 담당자에게 최근 출판 동향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그 때부터 내 머릿속은 나도 모르게 '오호? 그렇다고? 이런 건 바로 기사로 쓰면 될 것 같은데'로 가득찼다. 옆에 앉은 언니가 출판사 대표다운 종이 재질에 따른 단가 산정 등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나는 다른 걸로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가 '아 맞다, 나 문학 기자 아니지'로 귀결됐다. 아직 기자 태를 못 버린 까닭이었다.
그 즈음, 지인의 소개로 어느 1인출판사에서 하는 '봄날의 편집자'라는 과정을 알게 됐다. 편집자 지망생들을 위해 마련된, 한 권의 책이 나오는 과정을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한밤에 메일로 구구절절 지원서를 썼다. 그 정성이 가닿았는지, 총 3명이 선발된 '봄날의 편집자'의 한 명으로 한 권의 에세이가 나오는 과정을 지켜 보게 됐다.
어느 토요일, 원단으로만 유명한 줄 알았던 동대문 방산시장에서 미래의 편집자들이 만났다. K대표님이 연 '원데이 출판 제작 클래스' 덕이었다. 책을 이루는 각 부분의 명칭에서부터 출판계에서 쓰이는 다양한 용어들, 채도와 명도가 제각각인 종이 샘플들을 직접 살펴보고 만들고 싶은 책 모양을 생각해 보는 것, 책을 만드는 모든 구성원(저자, 디자이너, 인쇄소)들과 소통하는 법 등에 대해 보고 들었다. 책의 내용적인 부분은 그렇다치고 책의 크기나 표지·본문 디자인까지 편집자의 손이 안 미치는 곳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디자인에 관한 한 문외한인데…'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출판사에서 출간 준비 중이던 책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의 원고를 미리 받아보고, 함께 표지 디자인이나 카피를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다.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는 119안전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무요원이 소방대원들을 위해 차리는 음식 이야기이자 사람 이야기다. 고백컨대 나는 게을러서, 그 때 그 때 타임 테이블에 맞춰 대표님께 따로 의견 제시는 못했다.
이토록 게으른 편집자 지망생을, K대표님은 6월의 어느 월요일 파주 인쇄소에서 진행된 인쇄 감리에 데려가 주셨다. PDF 파일로만 보던 책이 실제 종이에 찍히면 어떤 색으로 구현되는지 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또 한 번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드디어 종이에 기록된 책을 들여다봤다. 아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거여서, 모르는 책들의 제작 과정을 보던 지난 인쇄소 견학 때와는 또 다른 '실감'이었다. 바로 오탈자를 잡아낼 것도 아니면서, 오래오래 그 물성을 들여다봤다.
6월 16일, 드디어 책이 출간돼 우리 집으로도 한 권의 책이 배송돼왔다. 소방관들의 더운 숨과 함께 그들을 위해 만드는 음식의 더운 김에 더해 책의 탄생서부터 동분서주한 K대표님의 노고까지 '물큰하게' 전해져왔다. 판권지에는 '도와준 사람들'에 내 이름도 적혀 있었다. 3년 전, 공저로 참여했던 <종이약국>에 이어 두 번째로 내 이름이 판권지에 적힌 책이었다.
뜨끈뜨끈한 한 권의 갓 나온 책.
이 일련의 과정을 다 거친 지금, 나의 솔직한 심정은 '편집자는 어렵겠다'다. 나는 꼼꼼하지도 않고, 남들과의 소통에 능하거나 셈에 빠르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디자인 감각이 결여돼 있다. 뭣보다 쓰고자 하는 열망이(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매우 강하다
'출판 제작 원데이 클래스'를 듣던 날, 클래스를 마치고 '봄날의 편집자'들끼리 청계천까지 걸어나왔었다. 그 중 한 분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도 기자 하고 싶었었는데, 너무 힘들어보여서 마음을 접었는데요. 기자, 어때요?"
기자를 그만두겠다고 퇴사를 한 와중에, 어떤 얘기를 해야할지 난감해졌다. 사실 지금의 내 기분만 생각한다면 'NO'에 가까울 테니까. 그러나, 사감을 덜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얘기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단어를 골랐다.
"솔직히 기자는 '워라밸'을 기대하기는 힘들고요. 하지만 '내가 콘텐츠의 1차 창작자가 되고 싶다, 그게 더 적성에 잘 맞는다' 하면 추천해요. '콘텐츠의 기획과 가공, 편집에 자신있다' 하면 출판 편집자가 더 좋을 거 같고요."
'봄날의 편집자' 과정이 모두 끝나고 한 권의 책을 손에 쥔 그 날, 그제사 그 말이 결국 나에게 돌려주는 말임을 알았다. 장담은 어렵겠지만, 어디선가 기자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