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을 나눔에 대하여
2024-05-16 초고.
0.
"아빠! 오늘 아빠한테 일기 썼으니까 자기 전에 꼭 보고자!"
잠들기 전, 유민이가 신신당부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근데 오늘은 아빠한테 썼다기보다는 그냥 내 일기를 썼어. 헤헤."
사랑스러운 딸이 나를 위해 뭔가를 적었다는데 뭣이 중한가.
"응, 아빠는 그것도 좋아. 유민이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고마워~ "
"유민이의 일기 제1장 2024년 5월 16일 목요일
오늘은 아침밥을 빵과 수프로 먹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월 E를 보여줬다. 그리고 곱셈 2학기때 하는 것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또, 엄마랑 오빠랑 성이시돌목장에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전에 오름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황조롱이와 까마귀 깃털을 보고, 주웠다. 게다가 엄마랑 오빠랑 나랑 하루종일 안 싸웠다. 그래서 더 좋았다. 저녁은 내가 스크램블을 접시에 깔고 위에 밥과 올리브유를 넣어서 만들어줬다. 오빠가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1도 안 도와줘서) 맛있다고 하면서 (잘 어울린다고) 잘 먹어줘서 좋았다. "
1.
나는 텍스트로 하는 의사소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에도 결혼 후에도, 흔한 연애편지 한 장 쓰는 것이 그렇게 고되고 힘들었다. 생일날 쓰는 카드 한 장의 분량도 채우기 힘들어 기어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카드를 고를 정도였다.
아내가 은우를 임신했을 때, 곧 태어날 은우를 위해 태교 일기를 쓰자고 했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해 시작은 했지만 대부분의 페이지는 아내가 채웠고 눈치가 보여 그나마 내가 적은 몇 페이지는 직장에서 힘들었다는 하소연만 가득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가족들과 3년째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은우, 유민, 아내와 각각 총 3권을 동시에 쓰고 있다. 그리고 더욱더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아이디어로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다.
2.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에는 대화와 소통이 언제나 우선순위에 있었다. 어릴 적 친구네 집에 놀러 가도 고급 아파트나 외제차가 있는 집보다 작은 식탁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그런 집을 부러워했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들도 어딘가 마음 한편에 어두움이 있는 친구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랐더라도 소통이 부족한 가정에서 큰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항상 쾌활하고 배려가 많던 친구네 집에 가보면 누구보다도 대화가 많고 화목한 집인 경우가 많았다.
언제든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아군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힘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대인관계와 가치관 형성에 있어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서부터는 소통이 원활한 가족 문화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고 같은 눈높이로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가족 간의 대화를 차단하는 TV나 디지털 매체들을 집에서 퇴출시켰다. 저녁을 먹고 식탁에 모여서 각자 할 일도 하고, 회의나 토론도 하고 때로는 책모임이나 강의도 하는 등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다행히 별다른 부침 없이 우리 가족은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그런 대화가 많은 가족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다양한 방식의 의사소통의 창구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화'는 분명 훌륭한 소통의 수단이지만,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했다. 생각 없이 나오는 말, 감정이 섞인 말이 때로는 상처가 될 수 도 있고 기억에 종속되는 말의 특성상, 오래 지속되기도 어렵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글'로 하는 소통이었다.
글로 소통하면 평소에 말로 하기 낯 뜨겁고 부끄러웠던 과감하고 솔직한 표현들도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뿐인가, 말로 하면 잔소리나 싸움이 될 말들도 글로 전하면 그럴듯한 걱정이나 조언으로 둔갑하여 전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훈훈하지 않을까. 특히 사춘기의 말로 하기 어려운 주제나 고민 같은 것들을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글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3.
가족 간에 글로 소통하는 문화를 처음 시도한 것은 5년 전, '가족 우체통'을 통해서였다.
당시는 은우가 한글을 막 깨칠 때였고 유민이는 한글을 전혀 모를 때라 제대로 된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나름 그림을 그려가며 재밌게 놀았던 것 같다. 한동안은 가족 모두 나한테 온 편지는 없는지 아침마다 우체통을 수시로 열어보곤 했다.
그러다가 3년 전에는 가족 전체가 같이 쓰는 가족 일기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잘 썼는데 생각보다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적인 공간이었기에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기록 : https://blog.naver.com/hidaring/222648548959)
고민 끝에 결국 큰 결심을 하고 은우, 유민이와 각각 따로 쓰는 교환일기를 만들었다. (결심하는 일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한 개도 쓰기 힘든 일기를 두 개나 쓰려니 처음에는 막막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의외로 쓰다 보니 내가 평소에 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술술 써졌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글 쓰는 게 힘들었던지 처음 몇 달은 형식적인 답장이 이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 혼자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은우에게는 주로 아빠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많이 적었고 유민이와는 일상의 대화나 만화, 그림 같은 것으로 소통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아이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공유하고 공감해 주려고 노력했고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https://blog.naver.com/hidaring/222668787775)
4.
그냥 즐겁고 쉬운 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솔직히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작정하고 하려면 오히려 피곤하고 힘든 일이 될 것 같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쓰거나 일하면서 짬짬이 써나갔다. 그렇게 반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변화가 찾아왔다.
어느덧 아이들이 점점 교환일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가 일기를 썼는지 확인하기도 하고 먼저 일기를 써서 내밀기도 했다. 아이들이 호응해 주니 나도 힘이 났다. 일기를 쓰는 일이 더 이상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반년만에 교환일기는 나와 아이들의 아주 훌륭한 의사소통 창구가 되었다.
미처 예측하지 못한 장점도 있었다. 아이들이 긍정적인 소통을 통해 나와의 관계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전부터 나랑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이었지만 일기를 쓰면서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이전보다 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화가 나거나 힘든 상황에서도 함부로 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일이 사라졌다. 소통을 통해 관계가 돈독해지니 애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지키고 싶어 했고 그 안에서 의외로 '권위'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부모의 권위는 강압과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상호 존중으로 서로 가꾼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교환일기가 궤도에 오르자, 나는 더 나아가 아내와도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평소에도 자기 전 밤늦게까지 대화를 하는 일이 많은 부부라 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또 일기장을 잡으면 할 말이 생겼다. 평소의 고민이나 말로 하기 어색한 주제도 더 깊이 있게 소통하게 되었고 그만큼 오해도 줄었다. 교환 일기를 통해서 오히려 말로 하는 대화도 더 늘었다.
5.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과의 소통을 고민한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어 사소한 일에도 부딪히고 갈등이 심화되면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려워진다. 오히려 소통이 중요해지는 이 시기에 대화는커녕 아이나 부모 한쪽이 소통을 포기하는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이런 가족 간의 대화의 단절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그 마음을 전하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그리고 왜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편이 되어주는 부모의 마음을 못 느끼고 외로움에 방황해야 하는 걸까.
다소 품이 좀 들기는 하겠지만 가족들과 글로 하는 소통의 창구를 마련해 둔다면 어떨까. 아이들의 사춘기를 현명하게 넘길 큰 힘이 되는 것은 물론 가족이 평생 간직할 보물 같은 기록이 생길 것이다. 마음먹고 시작하기가 힘들지 막상 해보면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 말이 없을까 봐 걱정이라고? 일단 시작해 보면 평소 내 안에 하고 싶었던 말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는 접어두고 스마트폰 할 시간을 쪼개서 딱 10분만 투자해 보자. 행복에는 의외로 엄청난 노력과 대단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부터, 일상의 기록을 가족들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
P.S.
얼마 전 주중에 고생 많이 했으니 주말에는 대청소를 해 놓고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쉬자고 했었는데 유민이가 답장으로 만화를 그려줬다.ㅋㅋ
만화를 본 아내의 한마디.
"아니 근데 나는 없네?"
소외감을 느낀 아내는 자기도 아이들과 교환일기를 써보겠다고 의욕을 불살랐다는 후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