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이란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좋은 뜻의 영악은 영묘할 靈(영) 악할 惡(악) 지나칠 만큼 영리하며 영묘하다는 뜻이다. 나쁜 뜻은 모질 獰(영) 악할 惡(악) 성질이 매우 사납고 모질다 라는 뜻이다. 영리하다 못해 기발해서 기묘하고, 모든 화가 결국 돌아올걸 알면서도 굽히지 않을 만큼 모질기도 했으니, 좋고 나쁨의 영악함을 '자'는 다 가졌다.
선풍기 앞에서 젖은 머리 흰 수건으로 감싸 툭툭 물기를 누른다. 양손 수건 끝 잡으면 앙상한 두 팔에 제법 굵은 힘줄이 보인다. 흘러내린 낡은 안경 한 번씩 검지로 올리며 또 한 번씩 '이쁜이'를 본다. 골고루 물기 털어낸 머리, 긴 손가락으로 빚질 해 주면 그 애는 머리를 제쳐 웃어댄다.
초록 대문에 한 발을 넘으려는 채로 정지해 버린다. 그 낯설고 이국적인 상황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다. 현실적이지 않는 연극 속 부녀를 웃지 않고 보고 서 있다. 아지랑이 피듯이 이내 뿌옇고 환해지는 영상에 눈살을 찌푸린다. 한발을 부자연스럽게 빼고 휙 뒤돌아, 아랫 입술을 누르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는다.
'니가 미워 이름마저 이쁜이인 니가 미워 죽겠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니가 있잖아. 그 손길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난데 말이야.'
다시 돌아 보며 초록색 대문을 노려보다 다시는 안 올 걸음으로 차갑게 돌아선다. 갈 곳 없는 발길은 온 동네를 터벅터벅 싸돌아 다닌다.
저 멀리서 허우적거리며 갈지자로 걷는 방향감 상실한 자는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걸어 온다.
'똑똑히 봐라 저 자는 누군지. '
'아 저 자는 내 아버지이군. 도망 가 어서 '
돌진해 오는 그림자를 피해 어디로 숨어야 하나? 겁먹고 갈팡이는 두발 다시 이쁜이 집 골목으로 쏙 들어가 숨을 고른다. '초록색 문이 왜 또 왔어'라고 묻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길 담벼락에 흰돌 하나 집어 들었다. 이쁜이와 시커먼 그림자에게 분노를 최대로 끌어올려
'이쁜이 엄마는 바람이 났네. ' 라고 쓴다.
눈치 없이 지 집인양 드나들어도 늘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이쁜이와 이쁜이 아빠에게 영악한 짓을 하다니 써놓고 바로 후회한다. 참으로 뜬금없는 나쁜 말을 써 놓고 한참을 쳐다본다. 정말 이쁜이 엄마가 꼭 바람이 난 거 같다. 너무 꽉 쥔 흰돌이 아파서 냅다 던져 버리고 누가 볼까 냅따 도망친다. 집에 오니 시커먼 그림자 패악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당신을 저주해 내 영혼을 바쳐서.'
그림자 눈길을 피해 방과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무사히 다락방으로 스며든다.
'참회하고 반성하기에 이만한 장소는 없지.'
무릎을 꿇고 내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인데 벌러덩 누워 영악한 자를 들여다본다.
주르륵 눈물이 흘러 귓속으로 들어가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웅웅 울린다.
'그래 지우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지우는 거야.'
지은 죄의 무거운 마음치곤 너무 푹 자고 일어난다. 입맛도 없어야 하는데 밥도 잘 먹고 대담히 그 골목으로 향하는 뻔뻔한 자가 낯설다.
골목길 담벼락에 흰 글씨가 없다. 쓰인 적 없는 듯 말끔하다. 살짝 열어진 초록색 대문 사이로 이쁜이가 서럽게 아빠 품에서 울고 있다. 통쾌할 줄 알았던 마음은 우리 엄마가 바람난 것처럼 불쾌하고 짜증이 난다.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습관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쭉 간다.
모든 일은 완전 범죄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한참이 지난날 이쁜이랑 인형 색칠을 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흰 종이에 이름 좀 써보란다. 한 짓을 잊어버린 영악한 계집애는 또박또박 이름 석자를 쓴다.
'아저씨 저 글씨 잘 쓰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잔뜩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름 석자를 한참을 보신다. '아' 풍선 바람 빠지듯 마음 한쪽이 빠져나간다. 참 잘 쓰는구나 말 대신에 울이쁜이랑 잘 지내라 하시며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주신다. 머리카락이 일제히 쭈뻣 선다.
'차라리 절 때려 주세요.'
이내 부끄러운 머리카락 진심 어린 손길 받아 금방 가라앉는다.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이런 느낌이군요.
제발 그 손길 거두지 마세요 제 아빠가 되어 주세요.'
현실이 그러하다면 난 꿈을 꾸겠다. 시커먼 그림자의 아빠와 이쁜이 아빠를 바꿔 버린다. 어딘가에 있을 진짜 부모가 어느 날 날 찾아오는 꿈도 자주 꾼다. 극적인 상상에 작은 몸은 둥둥 떠 자유롭고 행복하다. 깨어 있어도 꿈을 꾼다. 온 마음을 바쳐 언젠간 만날 아직 만나지 못한 부모에게 편지를 쓴다. 한번 시작된 거짓된 상상과 글쓰기는 자꾸만 현실 아닌 꿈 속에 가두고 꺼내고를 반복한다.
내 부모는 어디 있죠
당신들이었으면 좋을 텐데요
제 부모가 돼주시면 안 될까요
내 부모는 따뜻하고 고운 손을 가진
사람들일 거예요
곱고 긴 손가락으로 머리 만져 주면 헝클어지고 메마른 머리카락 금방 고운결 기름 바른 듯 매끄럽고 검게 빛날 거예요
쓸쓸하고 허전하며 불안하고 억울한 누명을 잔뜩 뒤집어쓴 마음속에
다 좋아질 거라는 다 괜찮아질 거라는 차분하고 온화한 전류 흐르게 해 줄 거예요
머릿속으로 심장 속으로 점점 퍼져서 온몸이 따뜻해지고 기분 좋은 아련함 같은 아지랑이 가슴에 퍼지면 고이 내 부모 다리 베개 삼아 잘 수 있을 거예요
내 부모는 심연처럼 깊고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일 거예요
고요하고 침착한 맑은 눈으로 바라 봐주면 두려움과 거짓된 행동으로 주저하고 회피하는 눈은 금방 본연의 착한 눈 흔들리지 않는 눈 진실과 맞주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눈 되어 나이에 맞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거예요
내 부모는 부들부들하고 적당히 투박하고 그 온기 또한 적당한 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일 거예요
입 속에 혀는 함부로 정화되지 않은 말을 하지 않고, 잦은 거짓말과 순간을 면할 교활함의 혀를 누를 수 있을 압으로, 진실되고 순수하며 자신을 속일 말의 번복과 횟수를 줄이게 해 줄 거예요 타이르는 압이 있는 말속에서 생채기와 자신 없음과 타박을 느끼게 하지 않으며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느껴지게 할 수 있을 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거예요
제발 꿈꾸는 다락방으로 저를 찾아 오세요.
상상 속의 일들과 현실의 괴리는 나날이 커지고 부모를 찾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다 포기하고 자를 지탱해 주던 글쓰기도 끝이 났다. 진실의 눈은 멀고 몸은 갈수록 나약해져 갔다.
어느 날 현실 속의 '자'를 똑바로 보는 순간이 와버렸다. 광녀가 되어 괴로운 듯 팔짝팔짝 뛰며 화염 속에 던져진 습작의 종이 활활 타 홀연히 재 되어 사라지는 또 다른 자를 보낸다.
꿈꾸는 다락방도 없어지고 이쁜이와 이쁜이 아빠도 없어지고, 영악한 계집애 독기도 사라지고 길고 긴 터널 속을 갇힌 듯 긴 잠을 자듯 말을 잃고 긴 침묵 속에 빠진다.
그립구나.
반짝이던 푸르고 단단했던 독기 어린 영악함이여.
때론 가끔 억세고 지나친 과욕 부리며 크고 작은 죄악과 실수로 번뇌하며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꼿꼿하게 자존심 세워 스스로 생각했던 일을 끝까지 해내고 쉽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고, 검은 그림자에 투쟁하며 나 자신을 지켜냈다.
그런 나의 바탕이 됐던 '영악함'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