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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Jan 24. 2020

배움의 의도

배움과 회답의 연속, 백남준.

우리는 혹독한 현대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매일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얻고 살 닿는 것에 대한 모든 배움을 느낍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두 번은 없다>에서 썼듯이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훈련 없이 죽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훈련 없이 나도 모를 새 죽어버린다면 세상과 관계 맺은 모든 것에 어떻게 대처한단 말입니까? 천재지변,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대처 없이 헤어지는 그 순간마저도. 우리는 이 훈련 없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사고하고, 고민하고 매 순간을 사랑하고 배웁니다. 한 번뿐인 삶 속에서 조금 더 안위한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배움과 회답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기억하고 잊습니다. 연습 없이 태어나 눈을 뜨며 깨작깨작 꿈틀거리다 기어코 걸음마를 배우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터득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회에 나가기 위한 발돋움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동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웁니다. 사회에서 첫째, 태어나 가족에게서 배우며 둘째, 교육기관에게서 배우며 셋째, 사회에게서 배우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교육이란 당연하게도 인류 역사에 있어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현재 반 필수적인 기능이기도 하지만요. 우리는 교육기관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는 법, 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법 같은 기초적인 생활부터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까지. 학교에서 배우라는 필요 과목이 많다 보니 사실 나는 기억나는 것이 잘 없지만 음악, 미술만큼은 다른 과목보다도 기억에 남습니다. 음악 수업시간 수행평가로 각 계절 악장을 외우던 비발디의 <사계>를 애정 하며 현재까지도 자주 듣기도 하고(궁금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장은 겨울 1악장이랍니다.), 시험기간에 나왔던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기억합니다. 단순히 좋아해서 기억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미술 교과서 하단 부분에 실렸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에 흥미를 느껴 한참을 봤습니다. '이상한 탑'같은 것도 미술 작품인가?라는 혼란을 겪었거든요. 그 당시 이 작품이 교과서에 실린 이유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게 교과서 속 작품들은 목표 점수를 달성하기 위한 부산물이었을 뿐이고 암기해야 하는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교육이란 학교에서 한 가지를 버리고 한 가지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고 한 가지를 버려왔던 셈입니다.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좋다는 작품들을 교육을 통해 소개해줘도 '이것은 공부일 뿐이야'라는 생각이 지배되기 시작하면 이 작품이 백억, 천억을 호가하는, 혹은 인류가 낳은 불가사의한 작품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다다익선>, 1988, 지름 7.5m, 높이 18.5m / 백남준

필자가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촬영한 사진. 예쁘게 담지 못해 아쉬웠다.


그 후, 수년 뒤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보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들렀어요. <다다익선>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교과서 속 공부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장엄함에 입이 떡하니 벌어지며 바로 매료될 수 있었지요. 이 작품은 1,003개의 모니터를 이용해 무려 18m 높이에 달합니다. 이 비디오 타워는 확실하게 웅자(雄姿)를 뽐냅니다. <다다익선>은 비디오 아트 창시자이자 거장 백남준이 남긴 가장 큰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본관 들머리를 찌를 듯 치솟은 형태가 무척이나 장관입니다. <다다익선>은 2018년, 한국전기안전공사의 정기 안전점검 결과 '계속 가동될 경우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누전상태'라며 재가동이 불가능하다 판정, 그 후로 꽤 오랜 기간 동안 식물인간로 있었어요. 단종된 부품들도 있어 재가동되지 않는 것도 있었고, 보수비가 상당히 많이 드는 단점이 있는 작품이어서 많은 전문가들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는 백남준 선생님이 생전 영상 이미지만 온전하게 내보낼 수 있다면 신기술을 적용해도 좋다는 의견처럼 복원하여 보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깊게 고심했을 겁니다. 이 대안 결과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전례가 되기 때문인데요. <다다익선>은 백남준의 유작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간 매진해야겠지만 향후 백남준 미디어아트의 복원 대표 사례가 되겠군요(ⓐ). 


2015년 어느 추운 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백남준 그루브 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답게 대부분의 작품은 비디오 속에 담았으며 자신의 영상을 30분 이상 봐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또한 백남준이 스스로 알려준 비디오 아트 감상법에는 3가지 전제사항이 있었습니다.


첫째, 셀프 없이 너 스스로 해라 Do it yourself….

둘째, 예술을 고상하게 만드는 좌대를 치워 버리자.

셋째, 나의 비디오 아트를 보기 위해서는 의자가 필요하다.


그 날 백남준의 철학이 담긴 16가지 이야기들을 보는 내내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지요.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었는데요.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이 없는 창조랑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넥타이는 목에 매는 거라고, 그게 '맞는 일'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말할 때 백남준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에서 백남준은 공연 도중에 무대에서 내려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충동적인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굉장히 무례하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물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장시킨 의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입니다. 백남준은 "넥타이로 상징되는 남자의 권위와 힘을 없애버리자"라는 뜻을 담은 의도였습니다.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힌 세기적인 작가. 자신은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세기(世紀)적인 예술가라고 말하던 백남준. 그의 파격적인 예술 세계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이런 악동 이미지 대신, 비디오 아트로만 알려져 있는 게 조금은 아쉽습니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 말고도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보고 한동안 충격으로 기억에 길이 남기도 했는데요. 내가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던 <다다익선>도 전위적이고 예술적이지만 행위예술가로서의 백남준 그 자체도 함께 알려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가 읽었던 미디어아트, 현대미술 관련 서적만 해도 백남준의 언급은 적어도 한 절씩 들어가 있고,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 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훗날 백남준의 명성을 넘는 한국 현대 예술가는 탄생하겠지만 현재까지는 없을 겁니다. 국내외 근현대 미술사에서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플럭서스(ⓑ)의 주요 인물 중 하나기 때문입니다. 행위예술가이건, 비디오 아트 개척자이건 공인된 위대한 예술가임에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참고

ⓑ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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