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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Feb 22. 2020

타인은 지옥이다.

장 폴 사르트르, <무드 인디고>, 가수 김윤아

모든 인간은 두 번 없을 한 번의 태어남으로 삶을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웃음을 지어내는 겉 같은 가면 속의 자아는 남들이 겪는 고통을 다 같이 겪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더 깊은 고통을 또는 상대적으로 얕은 고통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차이는 너무나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수치로 재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간직하는 깊이는 천차만별입니다. 나는 이런 아픔을 깊게, 오래도록 간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이란 주체성과 자유를 가진 주체입니다. 타자의 실재성은 나 자신과 같이 절대적인 확실성을 갖습니다. 절대적인 자유를 가진 각자의 주체들끼리 대면할 경우 양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타인의 마음 유형을 추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즉, 타인의 마음을 직접 파악할 수 없으므로 타인이 처한 환경과 그의 행동 연관 속에서 자신의 기준이 마음을 추정한다고 전제하는 것이지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쯤 되니 이 말이 옳게 느껴집니다.

왜 이 말이 옳게 느껴지냐 하면, 남은 나에게 남이고 나는 남에게 남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은 나를 외면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즉자적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외면적으로만 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내면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없으므로 어떠한 기준점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결국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자유라는 이름에 애써 추구하고 노력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서는 자유를 잃고, 나를 판단하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겼다고 말하면서 등장인물이 지옥이 있다면 바로 타인들이야.라고 말합니다.      

타인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지옥 같은 느낌에 관한 기준점도 없겠지요.               


영화 <무드 인디고> 스틸 컷, 2013 / 미셸 공드리 감독


미셸 공드리 감독의 초현실적 세계의 영화 <무드 인디고>는 복잡한 철학 글과는 달리 비교적 단순합니다. 콜랭과 클로에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하고 안위해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에의 폐에 꽃 한 송이가 자라는 병에 걸리게 되고 완치되지 못한 채 죽고 말거든요.


영화 <무드 인디고> 스틸 컷, 2013 / 미셸 공드리 감독


 <무드 인디고>에서의 장 폴 사르트르는 '장 솔 파르트르'로, 사팔뜨기와(ⓐ) 그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태반이 담배를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사랑하던 그 모습(ⓑ)마저 똑같이 묘사했습니다. 극 중 시크가 철학가 파르트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요. 저도 그 모습을 보고 더할 나위 없이 같이 좋아하긴 했습니다만 <무드 인디고>는 사르트르의 철학을 부정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철학이어도 말입니다. 영화에서 사르트르를 직접 연상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던 것 같습니다. 

타인이 비록 지옥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은 타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인간의 개인사에서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가수 김윤아는 2013년 말 자우림 9집 앨범 활동을 마친 후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10개월쯤 음악과 떨어진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김윤아는 SNS를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평범한 이웃의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편안해지고 치유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사람들의 절망도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한 모습만을 보여주길 원하니까요.     

김혜남 선생님의 <당신과 나 사이>에서도 SNS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곳에선 내 진짜 모습을 감출 수도 있고, 상대방 또한 그럴 수 있다. ‘셀카’를 찍어 올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수없이 많은 사진 중에 아주 잘 나온 사진만 골라서 SNS에 올리지 않는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최대한 포장해서 올린 다음 그들의 관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초라한 모습은 절대 올라오지 않는 SNS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고, 그것을 인정받고자 애쓴다. 그런데 자신을 잔뜩 포장해서 보여주어도 늘 뭔가 아쉽고 못마땅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더 잘나고 멋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달래 보지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알바천국에서 20대를 상대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존감이 가장 낮아지는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더니 ‘행복해 보이는 지인의 SNS를 볼 때’라고 대답한 사람이 27.6%로 1위를 차지했다. ‘취업이 안 될 때’가 22.7%로 2위를 차지했으니, 이 설문조사만 봐도 얼마나 20대가 SNS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금을 갚느라 허덕이고, 취업 준비와 결혼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가수 김윤아는 "음악 하는 게 부끄러웠다."라고 인터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노래하고 결국 남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또한 학창 시절에는 대입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취업 준비에 허덕였다가 사회인이 되어 돌이켜보니 대출받아 대학 간 그 세월이 허무하기까지 했습니다. 빛 대신 빚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씁쓸함을 느꼈죠. 학생들이 제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한국장학재단은 성공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어찌 됐든 장학금을 받는 인원은 한정되어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어려운 현실은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이 현실을 같이 아파해주지 못할지언정 누군가는 2016년, "학생들이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라는 발언도 했습니다. 부채를 안고 사회에 나서야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궁지에 몰린 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예도 있습니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우리는 속까지 헤아려 볼 수 없습니다. 김윤아 앨범의 제목 '타인의 고통'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가져왔는데요. 수전 손택은 인간이 갖는 필연적 감정인 고통에 대해 타인과 살아가며 존재하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 혹은 행운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앞으로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적어도 나만은 타인의 고통, 불행을 소비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게 지옥이라고 말하는 타인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선천적 난시와 근시(斜視) | 독감 후유증으로 각막에 백반이 생김. 그것이 사시로 발전.

참고

ⓒ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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