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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Mar 25. 2020

영감(靈感)이라는 도구

인문과 창의, 모딜리아니의 눈동자

어딜 가나 사람, 참 많이 만나죠? 가끔 보면 세상의 중심은 자연, 섭리 따위가 아니라 사람으로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가깝고도 먼 존재에게 자극하며 반응합니다. 기억 속에 휘둘려 사는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많은 정신적 도구들을 활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언어, 심리, 사고 등. 인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다양화된 것이죠. 

심리학자인 레프 비고츠키는 '정신의 도구'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요. 인간은 정신의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고, 보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태어나 유아기부터 정신의 도구를 획득하고 그것들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방법 및 전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화된 인간적 활동에 표현하고 창조하는 무언가에는 영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 듭니다. 아무리 많은 인파 속에서도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겁니다. 실제로도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당신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영감이라는 본질을 덮는 덮개 같은 도구로써 경험 혹 감격, 사상 등을 던져주기 위해 오해 섞인 말잔치를 벌이진 않나요?


예를 들어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자극을 시킨다든지 활력을 돋운다든지 도발을 한다든지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의미가 없을지라도 건네는 본인 당사자만큼은 소중하고 신경을 쓰게끔 만드는 이야기가 될 텐데 말입니다. 

영감은 찰나의 빛과도 같습니다. 형제가 없는데도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부터 일부 예술가들은 겸손하게도 어떠한 것을 창조할 때에 마치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영감의 원천을 '신앙'으로 표현한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작곡하며 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작곡을 마칠 때마다 각 작품의 끝에다 "하나님께 영광을(Laus Deo)"이라고 써넣기도 했습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희곡의 소재를 이용해 만일 인간이 한계에 다다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의욕적인 것들을 실현할 수 있게 될 때에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가를 묘사하는데요. '영혼'이 스스로 존재하는 힘에 의해 비로소 걸작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54x37.5cm, 1918-1919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긴 목과 얼굴, 알 수 없는 표정 속 텅 빈 공허한 눈동자를 가진 한 그림. 어느 날 잔은 자신의 초상화에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지 남편 모딜리아니에게 물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릴 것"이라고 말했죠. 열네 살이라는 터울을 극복하고 그녀는 모딜리아니에게 무한한 예술적 영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에겐 사랑이었고 꿈이었던 남편 모딜리아니를 병으로 잃은 상실감에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겠다며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자살한 잔.


사랑, 영혼, 신앙 등 다양한 것들을 통해 이제는 더 살아있는 것을 느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독일의 예술가 요셉 보이스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예술가를 업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것, "창의"를 중요하고 가치 있게 본다는 것입니다. 회사원, 주부, 학생, 의사, 노동자 업에 관계없이 창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작고 별난 세계에 무엇이든지 끌어들일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내 세계에 끌어들일지에 대한 질문은 끝이 없어야 합니다. 자신을 아끼되 감당할 만큼 그 무엇에게 나를 내던져야 합니다.  

지금 누리는 순간순간이 모여 인생이 되고 그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지금 이 찰나를 뱅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라고. 그러다 문득 주의를 돌아봤을 때 “여기까지 왔다니!”하고 깨닫게 될 걸세. 누구의 삶도 ‘길 위’에서 끝났다고 볼 수는 없어.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춤을 출 때는 춤추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춤을 추면서 어디론가 가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래도 춤춘 결과 어딘가에 도달은 하겠지. 춤추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

-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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