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환타지아 2000>의 음악
무언가 나를 사로잡는 순간은 많습니다. 그것들은 구체적이지 않은 형태로 매번 다가옵니다. 활동하는 표현적인 모든 것들을 마주했을 때 그 순간을 사로잡는 아름다움, 소리, 보드라운 혹은 으지적거리는 질감, 그 순간을 몰입하게 만들고 환하게 비추는 기품. 플라톤은 미의 대상을 가장 눈부시고 환하게 비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학은 우리에게 가장 눈부신 비추는 무언가를 주는 것인데, 우리는 미학을 아름다움을 보편성으로 전제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접하면서 이토록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름다움은 그 자신을 드러내는 감각 방식입니다. 미학은 감각 방식을 궁극적으로 추론하는 철학적 논의입니다. 미에 감정을 매기고 판단을 따르는 거나 반박하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인데 지금도 꾸준히 이론에 대한 복잡다단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나에게 미학은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종(種), 상태, 형태 등을 직접 마주하며 감정을 느끼는 행동이야말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칸트는 우리는 사물 자체(Ding an sich)는 알 수가 없고 우리는 오직 현상만을 알 뿐이라고 했습니다. 행위에 관해서 인간은 오직 이성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만이 진정으로 자율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인격적 존재가 됩니다(ⓐ).
마주한 현상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현상은 상징과 서사가 합목적적인 것이 됩니다. 이는 다시 마주한 당사자에게 되돌아감으로써 현상은 자신의 목적의식을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환타지아 2000>은 관람이라는 현상이 주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담았습니다. 디즈니에서 60년 전에 만든 영화 <환타지아>의 후속작으로 2000년에 개봉했는데, 이는 21세기를 축하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1999년 12월 17일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처음 상영되었습니다. 영화는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형태로 1940년 작인 <환타지아>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구성을 하고 선 녹음 후 작화 방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환타지아 2000>은 철저히 예술성을 고려해 만든 작품으로 8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토벤, 레스피기, 쇼스타코비치, 생상스 등 클래식 명곡들과의 조화로 그림에 가시적 생명을 불어넣어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8개의 시퀀스 중 세 번째로 등장하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는 한때 나를 사로잡은 시퀀스입니다. 1900년대 중반 미국 대공황 시절, 알 허쉬펠드의 화풍이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그리며 음악과 함께 시작됩니다. 노동자, 실업자, 부자 등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데요.
시대는 다르지만, 현대사회에서 겪는 괴리와 우울, 무력 그리고 권태와 같은 반복된 일상은 관람자에게 공감을 줍니다. 사람들은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아있던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나 무력한 일상으로 꿈꾸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음악에 리듬을 맞추고 품고 있는 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 우울감을 유쾌하고 밝게 표현할 수 있는 건 ‘랩소디 인 블루’라는 명곡을 사용해서인 것 같습니다. 삽입된 음악은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표현을 더욱더 풍성하게 취하도록 강조합니다.
나는 예전부터 '랩소디 인 블루'에 대해 많이 들었는데, 터키 피아노 연주자 파질 세이가 연주한 '랩소디 인 블루'를 참 좋아했습니다. '랩소디 인 블루'에 대한 표현력은 <환타지아 2000> 애니메이션이 여태껏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랩소디 인 블루' 시작을 알리는 클라리넷의 멋들어진 연주는 쾌감을, 음악은 자유를 계속 부르짖고 있습니다. 음악과 그림은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본질적 걱정은 괴리가 도사리고 있는 도시 속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꿈과 소중함을 망각한 현실에 눈을 뜨라고 개안(開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고 말한 키케로처럼 희망의 실현은 불분명하지만, 삶 언젠가 올 바람을 가슴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지만 그 바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고된 하루였지만 알 허쉬펠드가 그린 아이스링크 스케이트장에서 아무 걱정 없이 온몸을 맡기며 춤을 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퀀스가 말하는 상징과 서사는 나의 공명을 울리며 내가 처한 현실에 눈을 뜨게끔 도와주었습니다.
예술이 내게 주는 것은 즐거움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 출처 : 칸트 <판단력비판>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