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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이 Jun 17. 2020

선으로부터

작가 김정기, 성립

선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적극적이며 자유로우며 선에 의한 창조에 우리는 때론 세계의 여러 형태를 발견합니다. 선에 의해 응축되고 상상력으로 뿌리내린 그 선들의 모임에 감수성을 느낍니다.     

감수성과 이를 자극하는 상상력은 정신적 능력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좋은 거름망일 것입니다. 선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 반드시 창조와 창작활동은 아닙니다. 상상 혹은 현실에 부응하는 행동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하지요.     


모든 술(術)에는 단계와 그 방식, 능력이 필요한데 특이 미술에는 '상징'이 담긴 형상의 체계 또한 중요합니다. 미술이 어느 나라의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공감하고 인지한다는 것, 경험하며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는 이미지의 잔상이 오래갈수록 더 여운이 남는 법입니다.     


SK 이노베이션 X 김정기 작가의 <이노베이션(혁신)의 큰 그림(Big Picture of Innovation)>, 2016 / 김정기 작가

그렇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림에도 계단처럼 순서를 차근차근 밟아 올라 밀도를 서서히 좁혀가는 그것으로 생각하지만, 한국에도 이런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는 작가가 있습니다. 라이브 드로잉(Live Drawing)(* 주제나 소재에 제한 없이 자유로이 관객 앞에서 드로잉 하는 쇼)이라는 생소한 주제에서 그 영상을 확인하고는 ‘밑그림은 깔려있겠지.’라고 믿었던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김정기 작가는 SK 이노베이션과의 협업으로 국제 에너지, 화학 회사의 이상을 드로잉 쇼(Drawing Show)로 그린 광고를 게재했는데 이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김정기 작가는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남들이 못하거나 하지 않는 영역을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하얀 전지 위에 아무 밑그림 없이 펜 하나로 그림을 그리는 이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머릿속에 있는 그림의 세계를 실수 하나 없이 척척 그려내러 가는지 무척이나 신기합니다. 심지어 참고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기하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정확한 인체를 묘사해 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 일까에 대해 의심스럽지만, 작가의 강좌에서 뼈와 근육의 구조와 역할, 그리고 투시 원근법을 여러 번 관찰하고 연습하며 쌓은 내공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위치에 서 있기까지 피나는 연습과 반복의 결과물이라는 셈이지요. 

이 SK 이노베이션 광고는 단 2분 남짓이었지만, 내 머릿속엔 가장 오래도록 기억될 선의 향연이었으며 선의 춤사위였습니다. 이 광고에서 김정기 작가의 작업시간은 나흘에 걸친 17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린 그림의 주제는 이노베이션(혁신)의 큰 그림(Big Picture of Innovation)』입니다. 

그에게 어떤 주제를 쥐여주면 인물의 묘사뿐만 아니라 공간과 배경까지 어울리는 형상을 창조해냅니다. 그에게는 머릿속에 있는 모든 시각적 이미지와 눈앞의 모습이 이미 그려져 있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2015년도에는 “개인이 그린 가장 긴 그림” 종목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었습니다. 작가가 라이브 드로잉을 통해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은 행위 예술처럼 느껴집니다. 국내에서보다 국외 활동이 더 잦은 그의 작품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2년 연속으로 판매된 실적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국내에는 라이브 드로잉이라는 시장이 없으므로 국외 활동이 잦다고. 작가의 작업실에는 그의 초상화가 있는데, 눈이 여섯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코엔 콧물이 흐르는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여섯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본 것을 매일 그려온 일상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강강술래의 마지막 동작>, 2016 / 성립 작가

이와 반대로 휘갈겨진 선과 아주 단순한 오브제를 그리며 화려한 그림들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선을 절제할 줄 아는 작가 성립(Seonglib)의 그림에서 신선함을 느낍니다. 기본기가 가득 찬 화려한 색과 그림 속에서도 감수성을 느끼기도 하지만 선과 여백이 가득한, 빈 곳을 느낄 수 있는 여백에서도 감수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립 작가의 그림에 매료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여백의 신선함과 절제된 선의 형상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그 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쫓긴 듯이 휘갈긴 선으로 표현된 사람들은 표정이나 자세한 묘사 없이 정적이지만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상황에 부닥쳐져 있는지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이 휘갈겨진 선에서조차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대입하기도 하고 발견하기도 하며 삶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다 사람의 얼굴에서 선적인 요소를 발견했고 그 요소가 자신의 성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란 그 기분은 어떨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 참고 : https://skinnonews.com/archives/1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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