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잊혀지는 것,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잊히면 안 될 수많은 소재들을 잊어버립니다. 잊히는 것. 잊혀지는 것.
'잊다'의 피동사 '잊히다'가 맞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잊혀지다'라는 비표준어에 더 익숙합니다. 인간은 같은 무리 속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타인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타인을 의식할수록 두려움의 대상은 커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죽음'이 하나의 큰 사건인 것입니다. 인간이 타인 속에 머무를 수 없는 최종 무곡인 셈이지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꿰뚫렸을 때? 아니. 불치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人は何時死ぬと思う? 心臓をピストルで撃ち抜かれたとき? 違う。不治の病におかされたとき? 違う。猛毒きのこのスープを飲んだとき? 違う。人に忘れられたときさ。
만화 <원피스> 중에서
만화 <원피스>는 수많은 명장면을 자아냈지만 이 장면만큼은 저를 비롯한 누군가에겐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이 철학적인 대사로 원피스 극장판 시리즈인 <에피소드 오브 쵸파(2008)>를 보았는데 어찌나 울었는지, 같은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몇 시간 동안 훌쩍인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최종 무곡인 사후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죽음과 잊혀지는 것. 이것을 잘 조응(照應)한 영화 <코코(2017)>는 멕시코의 명절인 망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을 배경으로 합니다. 죽음보다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망자들(이미 죽었기 때문이겠지만). 멕시코 실존 인물들이 죽은 자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특히 프리다 칼로는 조연 급으로 등장해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해 준 덕분에 그녀는 무(無)의 영역에서 생전 반려동물로 키웠던 원숭이와 영원히 아프지 않게 살아갈 겁니다. 영화 속 사후세계는 연옥 개념과 비슷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적 교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승에서 잊혀지면 영혼마저 소멸한다는 설정을 갖기 때문이죠. 참고로 가톨릭은 영혼불멸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참고).
예술의 종류를 의미하는 개념인 '장르'는 어느덧 인간의 삶에 틈입하여 이야기들을 나누고 관계하며 색깔을 만들어 갑니다. 삶과 죽음, 물감과 화폭처럼 그들을 조응하게 될 때 나의 내면은 크레파스로 칠했던 그림이 유화로 번져갑니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 한국의 모노하 대표 미술가 이우환이 먼저 떠오릅니다.
<조응> 시리즈 작품으로 논란의 정점을 찍으며 17억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현대미술을 대중과 거리감을 만들었고 거리감은 대중에게 괴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우환은 이전까지 작업에 여러 개의 점이나 선이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캔버스에 점 하나만 찍히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점 하나에 17억입니다. 17억.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작품을 보고 '저런 건 나도 하겠다.'라는 일침을 놓기도 하지만 과정을 파헤쳐 보면 절대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캔버스, 물감, 붓 모두 특수 제작되는데 캔버스는 일본이나 유럽의 공장에서 직접 주문하고 물감은 작가가 직접 돌을 공수해와 갈아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뒤 점의 비슷한 크기의 종이를 꺼내 이리저리 놓아보며 그릴 위치를 정합니다. 수십 번 측량 끝에 허리를 90도로 꺾고 붓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한 번 칠한 물감은 며칠에 걸쳐 덧칠해져 최종적으로 점 하나를 그립니다. 한 번 숨을 잘못 쉬어서 삐끗하면 점의 형태가 완전히 망가지기 때문에 호흡 역시 중요한 과정입니다. 작가는 숨을 내쉬면서 긋거나 아예 숨을 참고 긋는다고 합니다. 이 과정이 무려 두 달이나 소요되는데 이것마저도 11번이나 실패한 뒤 완성되었습니다(참고).
이우환 작품을 보면 철판:돌, 물감:화폭의 관계에 서로 만나는 관계를 대응시키고 현상학적으로 해석하라고 던져주는 겁니다. 사실 작품은 자신이 느낀 바에 따라 감상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이우환도 미술이론가로 활동하며 작품에 그런 이론을 담았고 수억 원을 호가하는 철학에 그의 작품이 외형적으로 단순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어려운 예술이지만 마냥 즐겨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몸에 담은 창조자이며 예술가입니다. 예술은 기억에서 잊혀질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