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 된 그들

퇴사가 고픈 이유 (배려 없는 청자)

by 백취생

다시 시작된 회사 생활,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회사는 그대로였다. 과거보다 칼퇴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리고 회사 내 고성을 내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분명 객관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했지만 난 왜 회사가 퇴사 전과 똑같이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졌을까?


여름에 입사해서 2개월이 지났고, 이제 가을이 되었다. 달력으로 확인하는 가을과 몸으로 느껴지는 가을은 다르다. 나는 피부에 느껴지는 상쾌한 바람, 눈에 밟히는 낙엽, 마지막으로 어느샌가 줄어든 매미 소리로 가을 이 왔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피부에 달라붙는 무거운 공기, 생기를 잃은 동료들의 눈빛. 누군가의 고요 속 외침으로 내가 오늘도 회사에 왔구나를 느낀다.


-직장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직장생활은 설명(說明: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 말함) 혹은 보고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설명 혹은 보고한다.


5년 전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보고가 참 많았다. 불필요한 보고는 최대한 줄이자는 캠페인도 있었지만, 체감적으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많은 보고서를 작성했고, 팀장과 Review를 하면서 짧으면 몇 시간 길면 며칠간 보고서를 수정했다.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보고서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회사 내 관리자(임원, 팀장 등)는 조직 내 수행하고 있는 업무를 전부 이해해야 하고, 많은 안건들에 대해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보고서는 최대한 관리자가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들은 보고서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업무 지식에 맞게 작성되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못한 보고서에 대해선 불편함을 느끼고, 자신의 입장을 이해 못 해준다고 작성자에게 화를 낸다. 심지어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하는데, 방향성을 알려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보고서를 수정해서 가져갈 때마다 방향성이 바뀌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관리자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 또한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갈팡질팡했던 적을 생각해보면 그 부분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결론적으로 난 관리자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배려 없는 행동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관리자가 되어 보지 못해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살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해보려면 그 역할을 수행해보기 전까지는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다양한 관리자들 밑에서 업무를 진행했고, 보고를 하는 나의 이야기를 배려해서 들어주는 관리자도 만나봤기 때문에 배려 없는 청자(관리자)의 행동이 당연한 행동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당연히 청자를 생각해서 고민하며 말해야 한다. 하지만 청자 또한 화자를 배려하며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자를 배려하며 듣는다는 말은 경청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험상 경청은 말을 하지 않고 듣기만 해서는 이뤄질 수 없다. 누군가 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경청을 하는 청자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나의 의중이 무엇인지 물어봄으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내가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함으로 나를 더욱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경청의 힘이 아닐까?


오늘까지 3일째 보고서를 수정했다. 밤 9시에 겨우 OK가 되었고, 이 보고서는 사장님 보고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라는 그들은, 초등학생이 아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초등학생이 되나 보다. 생각을 젊게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 텐데......


다시 시작된 회사 생활,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회사는 그대로였다. 백수 시절이 그리운 밤이다.



<보고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참는 걸로_백취생의 생각>


나는 평소 딸의 일상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딸은 반갑게 다가와 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이야기 중에 나는 딸이 오늘 해야 하는 일은 했는지 물어본다.

딸은 조금 있다가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떠나 엄마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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