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출장 중 사색 (12)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by 백취생

출장 중 한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 친구 많이 없지?"


당장 위의 질문만 두고 보면 너무 예의가 없는 말 일수도 있으나, 딱히 불쾌감이 느껴지는 질문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단 생각보다 의구심이 먼저 든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몇 명을 기준으로 해야 하고 심지어 친구란 어떻게 정의해야 하지? 동갑내기? 형이나 동생은 친구가 될 수 없나? 그렇다고 나의 의구심을 상대에게 물어보지는 않는다. 경험상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 이런 나의 궁금증을 이야기할 경우, 그들은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 친구가 없겠다."


지금은 "너 친구 많이 없지?"라는 말은 '너는 좀 이상해' 혹은 '주변 사람들하고 다른 것 같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순히 정말 친구의 수를 물어보는 질문은 아니다. 아내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대화의 뉘앙스도 읽어야 한다고...... 그녀도 답답했을 것이다. 나는 항상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Small talk가 잘 되지 않았으며, 말에 담긴 뉘앙스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대화에서 말하는 비중을 줄이고 듣는 비중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대인 관계에서 아주 효과적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나의 생각에 관심 있어해 주면 좋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나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보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간혹 어떤 사람과 만나면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과 만난다면), 말이 엄청 많아진다.


회의 시간에 임원이 나에게 현재 내가 출장 중인 공장은 기본이 안되어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휴지가 있는 것이 기본인데 그곳은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했다. 너무 현실과 동 떨어진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과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급여의 차이도 있고, 학력에 차이도 있으며, 환경의 차이도 있다. 한국에서 가능한 일이라도 이곳에는 어려운 일이 있고, 그 정반대의 일도 있다. 하나의 진리라도 내가 어디서 그 진리를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음 행동도 달라져야 한다. 만약 나의 환경이 진리의 왼쪽에 있다면 나는 거기서 오른쪽을 보며 이동해야 하고, 오른쪽에 있다면 나는 왼쪽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결국 처해진 환경에 따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된다. 하지만 임원은 자신이 진리에 접근했던 방법만 옳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임원의 이야기에 답변했다. "여기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화장지는 개인이 챙겨야 합니다. 기본은 그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답변이 끝나고 주변에 팀장들과 선배들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임원이 회의 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기에, 나도 잠시 솔직해졌다. 나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했을 뿐인데, 선배에게 미친 거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회사에서 진행하는 회의란 누구나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기업들의 몰락은 이와 연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모두가 너무 솔직해도 문제가 되겠지만, 단 몇 명만 솔직할 수 있고, 나머지는 솔직할 수 없는 환경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실패에 대해서 서로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다음 실패를 막을 수 있지만, 항상 회사의 가장 솔직할 수 있는 몇 명은 실패의 원인을 항상 밖에서 찾아왔다.


다면적 인성검사에서 아스퍼거 경계선에 있다는 것을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내는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편했다. 그렇게라도 아내는 나를 이해하려고 한 거니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어찌 되었든 사회생활을 잘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책도 많이 읽고 사람과 사람에 대한 관찰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정리해서 상황에 맞는 행동과 말을 할 확률이 올라갔다. 타인에 대응하는 체계의 모형이 만들어졌다. 아직 부족하지만 80% 정도는 그들에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예상외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처음 딱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열 가지 모습을 알려면 열 가지 모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인연들 중 어떤 이는 한결같은 사람이 있었고, 어떤 이는 알면 알수록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결같이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이 있었고, 반대로 알면 알수록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 4가지 상황에서 인센티브가 들어가면 8가지 상황으로 나뉜다. 인센티브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또 한 번 관계는 달라진다. 어떤 이는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에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센티브가 없어졌을 때는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지능이 높으며, 결핍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런 모형을 그리면서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


첫 직장에서부터 선배와 동료로부터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첫 직장의 일부 선배와 동료를 지금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는데, 예전과 지금의 내가 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말하는 비중을 줄이고, 듣는 비중을 늘렸다. 과연 내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달라진 것일까?


솔직하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고 이야기했던 나의 주변 사람들이 아스퍼거 경계에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고, 결과적으로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환경의 영향도 아주 컸기 때문이다.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있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확률이 달라졌다. 24년에 이어 올해도 이곳에서 출장 생활을 하고 있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처럼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공황장애의 골든 타임에 들어왔다는 것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나는 또 첫 직장에서 겪었던 일과 비슷한 상황을 겪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 노출되어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 트레이닝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제품의 품질을 개선했더라도, 나의 일상은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 것 같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건 나의 바람일 뿐 이런 상황에 도달할 때마다 '어쩌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나의 선택으로 지금 상황을 좀 더 나은 상황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희망적인 글을 써보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면 나는 그저 나약한 인간이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나는 회의주의자도 아니다. 아직도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어떻게든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로또 당첨 확률을 올리려면 우선 로또를 사야 하듯이, 생존 확률을 올리려면 우선 마음의 여유를 사야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출장 중 사색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