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티켓 4장. 마감 7월 2일... 부랴부랴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팝콘과 음료 쿠폰도 있고 오징어 버터구이와 소떡을 주문하여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후다닥 해치웠다.
아이들과 함께 느긋하게 먹기에는 아직 이른 듯하다.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팝콘과 음료를 빼고 클리어.
시작도 하기 전에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으로 자리를 앉았는데 잔잔함이 계속 밀려 들어왔다.
어느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대체 왜? 눈물이 나지?
"어른이 되어 갈수록 기쁨은 필요하지 않나 봐"
정확히 이런 대사는 아니지만 뉘앙스는 이랬다. 기쁨 이의 테두리가 살짝 희미하게 처리되는... 기쁨 이의 존재가 사라질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쳐다보게 되었다. 나의 기쁨 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뺨 아래로는 내려가지 못하였다.
인사이드 1은 깊게 보지 않았다. 그냥 기쁨 이가 한없이 그리고 생각 없이 거기에 대책 없이 기쁨만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로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 기쁨 이는 작아져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모든 것을 기쁨 이로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다른 감정을 키우고 그것으로 대응하고 방어하고 대처하고... 그러면서 기쁨 이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대부분 영화를 보면 특정 캐릭터를 질타하고 미워하고 싫어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 건가? 기쁨 이의 편을? 그런데 그 편이 꼭 중요한가? 모든 것에 편이 있어야 하나? 그럼 여기서는 불안이 가 나쁜 건가? 하지만... 난 왜 이 불안이에게 공감하는 것이지? 불안이 도 잘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나는 불안 이를 질타할 자격이 있나... 실은 내 모습에 불안이의 모습이 겹쳤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가 눈물을 흘릴 때 나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잘해보려고 했는데..." 잘되기를 위해 한 행동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때의 좌절과 초라함. 끝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불안 이를 얼마나 키웠던가? 나의 불안으로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한 것은 없었나? 나는 왜 나 자신으로 그대로 살아가지 못했던 걸까?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안이는 사춘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 불안 이를 안고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래 괜찮아. 이제 불안이의 모습을 알았으니 네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면 돼. 아마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불안이는 커질 수 있겠지만 생각 또한 할 수 있겠지. 불안이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컴다운 시키겠지.
어찌 필요 없는 감정이 있겠는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인데.
영화를 본 후 나에게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꺼내 보았다. 슬픔도 분도도 인정하기 싫음도. 그리고 하나씩 마주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인지 하지 못 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 태어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나의 감정들은 나를 키워 나갈 것이니 부인하지 말고 안아 주는 선택을 해 보고자 한다... 때론 그러기 쉽지 않은 감정이 다가올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