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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Dec 14. 2023

속닥속닥 도서관 산책

오래된 책들의 골목


'내 몸을 누군가 만진다. 뻐근한 몸이 열린다. 어느새 바랜 내 속살 속 활자들이 기지개를 편다. 그런데 기껏 잠을 깨워놓고는 이 사람, 책장만 몇 번 팔랑이더니 도로 탁 닫는다. 어차피 읽을 생각이 없었구먼. 킁킁대는 걸 보니 이 자도 책냄새 깨나 좋아하네. 이야기 익은 냄새는 지나치기 어렵지.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오래된 도서관을 좋아한다. 카페처럼 꾸며진 새 도서관도 산뜻하지만, 낡은 도서관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책을 읽으러 간다- 가 아니라 산책을 간다.



옛날 도서관엔 주로 나무 책장이 많다. 습기 먹지 말라고 해마다 겹겹이 칠한, 무독성일리 없는 페인트 냄새가 제일 먼저 코를 찌른다. 한참 지난 아직도 냄새가 나는 건 코팅제가 목재에 스몄다가 아주 천천히 마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도서관 향수를 만든다면 탑노트가 눅진한 니스 냄새요, 미들노트는 숙성되는 책냄새다. 향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섞여 있지만 가장 중심은 나무 냄새다. 종이들 속에는 활자들이 내는 잉크 냄새도 있고, 제본할 때 쓰는 풀냄새도 있다. 나무에서 태어난 종이는 세월을 타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며 숲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새 도서관은 다르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빳빳하고 기세 좋은 신입 책들이 많다. 플라스틱 비슷한 냄새가 난다. 낡은 도서관일수록 느긋하게 오래 묵은 종이냄새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낡은 도서관으로 들어온 신입도 일단 등짝에 자기 주소가 딱 붙고 나면 그곳이 묻은 장독 자리가 된다. 역사가 누적된 향은 새 책 몇 권 들어온다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새 책도, 헌 책도 유행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서서히 나이 든다.



오래된 도서관 안은 서늘하고 조용하다.

아니 조용해 보인다. 그러나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책들이 자기들끼리 모인 골목에 들어서면 점점 귀가 트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듣는 소리다. 이  소리는 한 둘의 속삭임에서 시작해 여럿이 떠드는 것처럼 커진다. 나중에는 한낮의 장터처럼 맹렬해진다.

나처럼 이리저리 구경이나 할 목적이라면 상관없지만 애매하게 대략 살펴보고 골라야지... 하는 생각으로 준비 없이 들어오면 이내 책들의 기세들에 휩쓸리고 만다. 그러니 원하는 책이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시길.








가장 흥미진진한 골목은 소설코너다. 신중하게 뽑힌 제목들이 나를 유혹한다. 나 보란 듯 한껏 당돌한 제목이 있는가 하면 눈에 띄기 싫은 듯 소극적인 제목도 있다. 처연하거나, 야릇하고, 멜랑콜리하거나, 설레고, 미스터리 하고도 몽환적인 세계로 저마다의 초대장을 촘촘히 날려대는 낡은 상상의 골목. 나는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지럽고도 설렌다. 누가 밥만 넣어주면 이곳에서 몇 달쯤 갇혀 하나하나다 열어보고 싶다.



아동문학코너는 볕이 잘 드는 마당처럼 느슨하다. 책귀가 닳고 좀 찢어져도 봐주는 분위기다. 푸근한 외할머니 치마 무늬처럼 알록달록하고 크기도 다양하다. 즐겁게 퉁탕대며 들락거리는 아이들 손을 수없이 거쳐간 동화책들에서는 사탕 냄새가 난다.



요리책 코너에서는 밥상 차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문득 배가 고프다. 오늘의 구내식당 메뉴가 뭐더라.

각종 기술서, 심리, 실용서들 코너에선 각종 세상살이 전문가들이 포진해있다. 제목을 보다보니 다 나한테 필요한 얘기다.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서로 알려주겠다고 난리다.



법학서나 연구서적들의 골목에 들어선다. 각 잡고 모인 양장본들이 엄숙하게 앉았다가 일제히 나를 보는데, 무식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슨 일로?'라고 묻는 것 같다. 나는 재빨리 돌아나온다.



도서관처럼 엄밀한 규칙을 가지고도 헷갈리는 공간이 또 있을까. 아까 봤던 그 책이 여기인가? 아니 저쪽이었나? 문득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든다. 분류기호는 암호와 별 다름없고, 눈앞의 책을 지나치면 되돌아와 다시 똑같은 책을 찾기 어렵기 일쑤다. 누가 일부러 길을 잃어버리라고 고안한 것 같다. 폐소공포가 있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을 좋아하지 않겠지. 나같은 길치는 금새 이 세계를 잊고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몇 바퀴 째 좁은 미로를 헤멘다.




앗, 구석진 틈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다.

누가 작은 의자와 낡은 난방기구도 가져다 놨다.

햇살이 비쳐 들고 때론 비가 들치긴 해도 여기가 이곳의 숨구멍. 바깥 바람냄새를 들이마신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 길을 잃을까 불안하다면 이 자리가 명당이겠다. 시간을 느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정신을 반쯤 영원의 시간에 담그고, 몸은 바깥세상에 내놓은 반신욕 같은 독서,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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