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드롱 Nov 20. 2023

해피엔딩 말고 다른 거 없나요

초2의 글짓기 숙제를 읽고

우리 집 초2 조이는 내 바람과는 달리 책 보다 만화책을 선호한다. 글쓰기는 귀찮은 숙제에 불과하다. 손가락도 아프고 애초에 글짓기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의 효능을 어쭙잖게 설명하다 거부감부터 생길까 봐 당분간 내버려 두기로 했다. 틀린 글씨가 있어도, 내용이 방구 같아도 간섭하지 않을게. 맘대로 써라. 아직은.


이번 주 아들의 글쓰기 숙제는 동화의 뒷 이야기를 지어오는 거였다. 한숨을 쉬더니 역시 10분도 채 안돼 일필휘지로 완성한다.

이야기는 때와 장소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1. 시간: 점심때

2. 장소: 성에서, 동굴에서, 모텔에서

3. 인물: 엘리자베스 공주, 로널드 왕자, 드래건


‘모텔’이라는 단어가 걸리지만 넘어가야지.

예전에 외곽 국도변을 지나다 창 밖 궁전 모양의 모텔간판을 보고 아들이 물었던 게 기억난다. “엄마, 모텔이 뭐야?” 훅 들어오는 질문에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저긴 말이야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애용하는 러브호텔이란다라고 말해줄 수도 없고, 응, 흠. 뭐 호텔이랑 비슷한 곳인데,,, 시설이나 비용이 그보단 좀 저렴한 곳….???이라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아홉 살의 글에 모텔이 나오는 거야. 글 내용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기로 했던 게 생각 나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숙제검사를 꼼꼼하게 하시는 담임선생님 얼굴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근데. 조이야,  여기 모텔이라고 쓴 거야?”


“응”


“음… 호텔이라고 바꾸면 안 돼?”


“(잠시 생각) 왜?… 모텔이라고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그 그렇지, 너는 모텔이 뭔지 알아?” 물었더니, 자신 있게 응! 하고 대답한다.


“뭔데?”


“모텔은 호텔 비슷한데, 길을 잃은 사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야.”


“…. 길을 잃은 사람?”



“응. 그리고 또, 여행을 하는 사람이 호텔보다 오래 지내는 곳이야.”


“아…?”


“그리고,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잘 수 있게 해주는 곳이야.”


“아…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지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음… 공짜는 아니고-아주 싸게~. “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 정돈 나도 안다는 듯 눈을 찡긋하며 대답하는 아들.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면서 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얼버무렸다.








 <종이봉지공주>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대략 줄거리는 이렇다.

정략결혼이 약속된 공주와 왕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드래건이 성과 공주의 옷을 싹 불태우고 왕자를 납치한다. 공주는 입을 옷이 없어 길에서 종이봉지를 주워 대충 가리고 드래건을 찾아간다. 지혜를 발휘해 용을 물리치고 왕자를 구한 공주. 하지만 왕자는 종이봉지를 뒤집어쓴 꾀죄죄한 공주를 질타하며 진짜 공주처럼 차려입고 다시 오라고 한다. 그러자 공주는  왕자에게 “흥 너야말로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라고 외치며 결혼을 취소한 후 뻥 차버린다는 MZ세대 공주이야기였다.


와. 초2 권장도서이자 교과서에 실리는 동화의 분위기가 이 정도가 됐다.

우리 때 초등 교과서는 철수와 영희가 사회의 관습과 성역할을 고분고분 배우는 거였는데. 열린 마인드라고 나름 자부했던 나와 남편이지만 이 세대 아이들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그러니까 자칫 방심하면 꼰대부모가 되는거다.

어쨌든 아들이 이 동화의 의도를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녀석이 만든 뒷이야기는 이러하다.



‘성이 없어진 공주는 왕자까지 떠나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동굴이 보여서 거기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 공주는 그 동굴을 꾸몄습니다. (에어비앤비?)

그러자 한 사람이 여행쿠폰을(?)주어서 공주는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공주는 어느 모텔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모텔 서랍에 엄청난 양의 금이 있어서,

부자가 되어 살았습니다.

끝.’




아무리 숙제하기 싫어 꾸역꾸역 쓴 글이라도 아들 머릿속 현주소(?)를 알 수 있는 글이었다. 과연 이 글에서 모텔이 문제인가. 그보다 다른 데가 더 걸렸다.


< 알게 된 아들의 생각>

1. 문맥상 ‘모텔’은 ‘호텔’이 되면 안 된다.

2. 누가 결혼을 박살 냈든, 결과적으로 집 없는 외톨이가 된 공주가 불쌍하다.

3. 동굴을 꾸미면 (에어비앤비?) 부가가치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여행 쿠폰 정도의 부가가치)

4. 살기에는 동굴보다 영국의 모텔이 낫다. (호텔로 설정하지 않았다. 의외의 현실감각)

5. 집 없는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려면 행운(서랍 속의 엄청난 양의 황금)뿐이다.

6. 결혼보다 나은 해피엔딩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삶의 행복한 결말이 잘생긴 왕자와의 결혼식이라는 환상은 진작 깨져야 옳다.

그런데 그 대안은 뭘까? 나도 궁금하다. 아이들은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어른들이 해주는 그 얘기가 요즘 아이들 마음을 설득할 수 있으려나.

솔직히 아들의 글을 읽고 할 말이 없다. 틈만 나면 집값의 시세를 보며 일희일비한다. 경쟁에 처질까, 매사에 손해를 볼까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그런 부모를 보며 솔직하게 나온 반응일 뿐이다.





‘엄마, 우리 삶의 해피엔딩은 뭐야?’




이미, 아이가 태어나며 질문은 던져졌는데 우리는 적당한 대답을 잘 미루고 있다고 착각했다.

우리 꼴을 내내 소리 없는 대답으로 듣는 줄 몰랐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게 ‘얘야 행복한 삶은, 대출 없이 안정된 집과 돈을 가진 부자가 되는 거란다’라고 매일 가르치고 있었나 보다.


오늘 밤엔 남편과 진지하게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

이제부터 애 듣는데서 집 얘기 돈 얘기 조심하자. 우리부터 가치관 좀 점검해 보자. 힘들어도, 이젠 나누는 삶을 실천해 보자. 이제 그럴 때가 됐다고.



그리고 조이야,

‘사실은 엄마도 잘 모르겠어. 아직 찾는 중이거든. 해피엔딩이 뭔지.

해피한 건 좋은 거지만 삶에는 더 중요한 것들도 많다? 엄마가 요새 느끼는 건데, 사람이 꼭 해피해야 될 필요 없는 것 같아.

해피하려고 너무 애쓰다가 그만 안(?) 해피 해지는 경우도 많거든.

그러니까 ‘좋은 엔딩’이 더 좋을 것 같아. 엄마도 좋고, 너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그렇게 ’다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엔딩 말이야.

엄마랑 아빠도 잘 찾아볼 거야. 보물찾기처럼… 우리 같이 찾아볼래?

그러다 보면, 너만의 ‘좋은 엔딩’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이 말은 입밖으론 안 할 거다. 초2남아는 말 길어지는 거 질색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