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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Feb 01. 2024

벌써 노안이라구요?

흐릿하거나 선명하거나


고등어를 구웠다. 맛나게 먹다가... 

아얏. 아들이 찡그리며 입에서 가시를 골라낸다. 




가시? 어디? 안 보이는데....?




가까이서 눈을 치뜨고 아무리 찡그려보아도 요즘은 가까운 게 더 안 보인다. 

안과에 갔더니 '노안'이 왔단다. 저 아직 노인 아닌데요…  아직 45세인걸요. “40대가 넘으면 노안이 시작돼요. 더 불편해져서 돋보기 쓰기 전 까진 어쩔 수가 없어요.” 납득이 어렵다는 반응에 익숙한 듯 의사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노안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분들을 위해 대략 말하자면 이렇다. 

눈앞부터 20센티 정도는 초점이 안 맞고 1미터 내외의 거리는 안경을 쓰면 어지러워서 벗어야 하고, 더 먼 거리는 안경을 써야 보인다.  줄곧 썼다 벗었다 해야 하니 초등생이 쓰는 안경줄을 사야 하나 싶다. 게다가 검사를 받아보니 녹내장 의심도 된다니 청천벽력 같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노안 정도는 걱정거리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그림을 그려야 하는 나는 시력이 생명인데…

노화란 그저 주름살 정도 생기는 것으로 대충 생각하다가 놉! 아니거든!?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 동안 인생에서 꽃과 열매를 맺는 과정까지만 집중했다. 그 이후 시들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멀었겠지 하며 건강을 과신했던 거다. 그래서 아무거나 먹고 무리해서 일하고 운동도 안 했다. 그래서 대가를 더 빨리 치르는 거겠지.




우아 귀찮다. 

매 순간 내가 보려는 것에 따라 안경을 쓸까 말까 신경 써서 결정해야 하는 게 계속되니 성가시다. 그래서 피곤해지면, 안경을 벗고 그냥 모든 게 흐릿한 상태로 한나절을 지내기도 한다. 눈앞에 블러 필터를 낀 듯한 세상은 뽀샤시하다. 꿈처럼 현실감도 흐려지지만, 자잘한 먼지나 잡티 따위도 보이지 않으니 맘은 편하기도 하다.




세상엔 집중해서 예리하게 봐야 하는 게 있고,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나은 것도 있다. 내 마음과 태도는 민감하게 분별해야겠지. 자칫 방심하면 말이라곤 안 통하는 꼰대가 된다. 어렸을 때 꿈꿨던 다정하고 지혜롭고 재밌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진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거다. 돌아올 시간도 별로 없을 테니까.




성격 상 쉽진 않지만 남의 허물은 흐릿하게 봐야겠다. 예전엔 거슬리는 게 있으면 아주 신랄하게 까는 걸 유머로 은근히 즐기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똑같은 잘못을 하고 또 그러고 나니 아주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라서 흉을 본 게 머쓱해지기도 했다. 




그 사람 진짜 상식이 없어. 

저 사람은 진짜 기본이 안 돼있네. 



이런 말들도 사실은 주관적인 것이라 자신이 살아온 문화나 경험에 따른 기준일 때가 많다. 나한테는 당연한데 타인에게는 적당히 넘어가도 괜찮은 일 일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들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타인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내 편들어달라고.




얼마 전에 시어머니에게 속 쓰린 말을 들었다.(나도 내 편들어달라고 여기 씀) 

“아무리 못해도 살림의 기본은 지켜야 남편도 바깥일을 맘 편히 하지!” 내가 살림을 못해서 못마땅하다는 맥락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당황하여 아무말을 못했다. 머릿속으로 질문했다. 내가 살림을 그렇게 못하나?! 그래. 뭐 셤니에 비하면 청소도 잘 못하니 집에 먼지도 많고 반찬도 부지런히 안 하니까…그래 내가 살림을 못하는 건 맞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억울한 생각이 들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다.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살고 있는데 그게 본인 기준에 못 미친다고 ‘기본’이 안 됐다고 하다니. 적어도 세 식구 안 굶기고 때맞춰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고 굴러가면 기본은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할수록 화딱지가 났다.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더구나 고부간에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기준에는 그거야말로 사람을 존중하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서로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게 원흉이다. 인간다움의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게 ‘기본’이며 ‘상식’이라 이게 다르면 특히 화가 난다. 그러고 보면 부부 싸움도 그놈의 ‘기본’을 안 지켜 생기고 부모 자식과 친구 사이, 나아가 정치 싸움과 노사분쟁도 ‘기본적인’ 무엇을 안 지켜서 탈이 나는 걸 보면 그 선이 인간 심중의 어떤 두려움을 건드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부터도, 내 말만 옳고 화부터 내는 옹졸한 노인이 되지 않으려면 눈을 부릅뜨고 나 자신을 봐야 하겠다. 기막혀 화가 날 때도 상대의 기본은 좀 다르려니, 그러니까 다른 좋은 점도 있지 생각하며 그냥 안경을 휙 벗어버릴 필요도 있겠다. 




오늘 아침, 아홉 살 아들이 “힝, 사랑해, 엄마 사랑해” 하며 껴안고 얼굴을 부볐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거울을 보니 눈곱이 덕지덕지 붙고 머리는 산발인 꼴이 아주 가관이다. 

이런 얼굴로 뽀뽀세례를 받은 거냐…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그에게는 눈곱도 늘어진 셔츠도 김치 얼룩 같은 것도 안 보이나 보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서 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 




물론 당분간이겠지. 내년이면 뽀뽀도 안 해줄지도. 

이 어린이에게도 곧 세상의 ‘기본’ 몇 개 쯤 생겨날 테니까. 이 녀석의 시력이 좋아지기 전까진 나도 이 행운을 선명하게, 야무지게 누리는 게 장땡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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